본문 바로가기

은유일기

2020.9.15

"집사람 생일에 장미꽃을 선물할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전주역에서 강연장까지 가는 택시를 탔다. 기사님이 말을 건다. 차창을 향해 있던 고개가 절로 앞을 향했다. 백미러에 비친 기사님 얼굴을 보니 '어르신'이다. 물기가 빠진 탁한 목소리와 뒷목의 주름으로 보건데 67세 추정. "아, 너무 낭만적이에요. 당연히 당연히 괜찮고 너무 좋죠." 나도 모르게 호들갑을 떨며 맞장구를 쳤다. 기사님은  "근데 꽃은 이삼일 만에 시드니까"라며 망설여진다고 했다. 나는 우선 꽃선물은 받는 순간 기쁨이 크고, 이삼일이라도 눈길 스칠 때마다 행복한 게 어디냐, 향기가 진해서 심신 안정에도 좋다, 꽃선물을 받으면 스스로 꽃처럼 예쁘고 귀한 사람이 된 것 같아 자존감이 상승 효과가 있다 등등 의견을 피력했다. (이럴 일인가?)

 

그리고 질문을 드렸다. "근데 왜 갑자기 아내분에게 꽃선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셨어요?" (인터뷰 본능) 기사님은 아내분이 지나가는 말로 자기는 지금까지 꽃다발을 한번도 못 받아봤다고 하는 걸 들었다고 했다. 아니 이렇게까지 강력한 신호를 던지는데 무얼 주저하시냐, 나는 주장했고 우리의 논의는 '꽃다발 내용물'로 구체화되었다. "장미는 몇 송이가 좋을까요? 생각보다 비싸던데..." "그러면 장미 한 열송이 하고 다른 꽃으로 풍성하게 하면 돼요. 삼만원에서 오만원만 해도 예쁜 다발 만들어져요." 기사님은 아내분이 예순네살이니까 장미로만 64송이를 하면 어떻겠냐고 한다. 나는 또 굿아이디어라고, 한송이에 천원씩 6만4천원 정도 예산으로 완전 특별한 선물이 될 거 같다고 했다. 기사님도 그럼 그러마 수용하는 것으로, 생일 선물 꽃다발 건은 합의에 이르렀다. 

 

아내분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내 머릿속에서 선물 증정 장면이 영상지원 되는 찰나 약간의 우려가 생겼다. 처음 꽃다발을 받아보는 사람은 꽃다발을 받을 때 짓는 표정을 모른다. 대한민국에서 자란 64세 여성이면 사랑을 받기보다 주는 일에 익숙할 것이다. 사랑받는 사람의 태도, 표정, 감정이 오작동을 일으켜서 이상하게 표출될 가능성이 컸다. 가령 두근대는 심장과 다르게 입에서는 "왜 이런 걸 사와요. 돈 아깝게"라든가 웃지도 울지도 못한다든가. 마치 낡은 수도꼭지 틀면 녹물 나오듯이 말이다. 그래서 또 기사님에게 말씀드렸다. "만약에 꽃다발을 드렸는데 아내분이 뭘 이런 걸 사왔냐고 말해도 상처받지 마세요. 너무 좋은데 표현이 안 되고 자기 감정이 어색해서 그러실 거거든요. 처음은 다 서툴잖아요." 기사님이 알겠단다. 뭔가 장미꽃 프로젝트 컨설팅을 마무리한 느낌이 드는 찰나 목적지에 다다랐다. 예쁜 선물 하세요, 말씀 건네고 차문을 닫는데 내가 꽃다발 받은 양 뺨이 붉어지는 느낌이다. 

 

자기 욕망을 안다는 것, 자기가 받고 싶은 사랑을 정확히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는 것. 인생과 관계에서 꼭 필요한 이것을 우린 살면서 어디서 배울까. 해도해도 어려운 것이 사랑. 표현해보지 않으면 몸이 굳어버리는 사랑의 일. 

'은유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 김영사인가 -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 작업노트  (0) 2023.01.09
2020.9.21  (3) 2020.09.22
2020.8.27  (0) 2020.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