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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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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가판대 상장, 그리고 오후의 산책 서울 사는 게 점점 부끄럽다. 어제 숙대입구역 버스정류장에서 경악했다. 금빛 테두리에 궁서체 글씨, 누런 트로피 그림이 그려진 커다란 상장이 가판대마다 나붙었다. 내용은 ‘당신이 서울을 빛낸 진정한 영웅입니다.’ 가판대마다 수상자가 달랐다. 건설노동자, 대중교통기사, 환경미화원, 식당 아주머니들, 소방공무원 등에게 주는 상이란다. 하나같이 3D업종, 저임금에다 비정규 직업군 종사자다. 홍대 청소노동자 파업사태를 의식한 모양이다. 당사자가 저걸 보면 어떤 느낌일까. 나로선 일그람의 진심도 느낄 수 없다. 우롱하는 처사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서민들은 생활고가 심해 아우성인데 저런 유치찬란한 상장놀이를 기획하고 있다니, 괜히 5세 훈이 아니다. 서울시 공무원 중에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 진정 아무도 없는가. ..
명동의 새벽을 여는 사람들 짙은 보라색 어둠이 칠해진 거리. 군데군데 간판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황량한 대로변엔 삶의 배설물이 낭자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캔이 구르고 비닐이 저 홀로 춤춘다. 옷깃을 세운 남자가 단역배우처럼 구부정한 뒷등을 보이고 사라진다. 정지화면 같은 적막함 뚫고 어디선가 쓰륵쓰륵 싸리비질 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은 산사의 정적을 깨우는 목탁소리 같기도 하고 아침밥을 짓는 어머니의 쌀 씻는 소리 같기도 하다. 반복적인 만물의 기척에 산새가 파닥거리고 아이들이 눈 뜨듯이, 연두색 빗자루가 지나간 이곳 거리도 서서히 잠에서 깨어난다. 새벽 5시 반, 해님보다 먼저 찾아온 환경미화원으로부터 명동의 하루가 시작된다. “새벽 4시 넘어 일어나서 첫차 타고 나와요. 겨울이 추우니까 제일 힘들죠. 더운 게 낫긴 한데..
2011년 1월 22일, 명동유람 2011년 1월 22일 토요일 오후 2시. 수유너머R에서 마련한 이상엽 사진강좌 출사수업이 명동에서 진행됐다. 이상엽 선생님 꼬드겨서 강좌를 기획한 사람으로서 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그날이 나의 생일이라도. 처음엔 생일이라서 빠지려다가 생각이 바뀌었다. 생일이니까 가보고 싶었다. 서울을 사랑한 여인, 마흔 살 생일에 국내 최대 번화가 명동을 걷는다. 카메라를 들고서. 사진강좌 제목이 ‘마틴파처럼 찍기’이다. 난 마틴파를 모른다. 앞의 이론수업도 안 들었다. 게시판에 올라온 사진 석 장 훑은 게 전부였다. 처음엔 그저 선생님과 수강생에게 인사만 하고 따라다니려고 했다. 그런데 이상엽 선생님이 내 디카를 플래쉬 강제발광으로 설정하고는 테이블에 놓인 케첩 한 장 찍어주고 ‘이렇게 찍으면 마틴파 사진’..
홍대 청소노동자 농성장에서 지난 월요일에 홍대 앞에서 약속이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3년 만에 연락이 닿은 과거 동지들과의 모임이었다. 1월 2일 청소노동자 170명 해고된 후부터 홍대 앞은 더 이상 나의 놀이터일 수만은 없었다. 원래 계획은 일찍 나서서 홍대 농성장에 들르려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회포를 풀기 위해 만난 선배들에게 빨리 밥 먹고 가보자고 할 수도 없었다. 여태 뭐하다가 이제 와서 유난 떠는 거 같아서. 암튼 차일피일 하다가 오늘 저녁에 홍대 근방에 아는 언니와 일이 있었다. 밥을 먹으면서 눈치를 보다가 슬쩍 운을 뗐다. “잠시 가보자. 월급이 75만원이었대. 점심갑은 한달에 9000원이래. 홍대 총학생회장이 외부세력 운운하는 헛소리 들었어?” 난 괜스레 흥분해서 횡설수설 떠들었다. 다행히 언니가 동의해서 편의점에서..
삼성노동자 자살 "12시간 근무 기본…나 죽었다" '삼성LCD 고 김주현님(남,26) 빈소 순천향천안병원에 와 있습니다. 사측관리자들 말고는 너무도 적막하네요. 조문, 내일 11시 기자회견, 반올림카페에 격려글 올리기 등 마음과 힘을 모아주세요.' 어제 오후에 공유정옥 활동가에게 문자가 왔다. 삼성전자 직원이 또 죽었다니 무슨 일인가 기사를 찾아봤다. 하루 12시간-15시간 노동강도를 견디지 못한 26세 남성의 자살이다. 전혀 몰랐다. 포털화면에는 삼성가재벌녀 이부진 이서진의 패션감각 분석 기사가 떠있었다. 그동안 삼성에서만 100여 명의 노동자가 죽었고 죽어 가고 있으며 죽을 것이다. 전에 삼성일반노조 위원장님이 삼성전자에서 직원 뽑는 방법을 들려주셨다. 실업계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 관광버스에 태우고 가서 강도 높은 체력테스트를 거친 이들만 합격시킨다..
택시기사님과의 토킹어바웃 아들이 다섯 살 때쯤이다. 연산력 강화를 위해 눈높이 수학을 시켰다. 그런데 매일 반복적으로 풀어야하는 게 안쓰러워 두어 달 하다가 끊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들이 모여서 금연에 관한 얘길 나누었다. “누가 담배를 끊었는데 어쩌구 저쩌구..” 그랬더니 아들이 물었다. “엄마, 눈높이도 아닌데 담배를 어떻게 끊어?” -.- 학습지도 아닌데 끊어야할 것이 있으니, 내겐 택시였다. 하지만 늘어난 백양 면팬티 고무줄처럼 이미 커진 씀씀이를 줄이기는 좀처럼 어렵다. 카드대금사용서 내역을 받아볼 때마다 뜨끔하다. 조금 서둘렀거나 참았으면 발생하지도 않았을 지출일 텐데 싶어 반성한다. 특히 이번 동절기엔 한파 강타와 건강 악화로 지출 급증이다. 후회하면서도 ‘빈차’의 빨간불만 보면 손이 번쩍 올라갈 때는 대략 두..
꿈의 비상구, 인천국제공항 4천미터 활주로 손수레 한가득 짐 꾸러미를 이고 지고 밀고 끌고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 화사한 신혼여행 커플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효도관광 떠나는 어르신들도 있고 출장길에 오른 비즈니스맨, 인식의 지평을 넓히려는 유학생,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랬듯이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에 이끌려 긴 여행을 떠나는 이들도 섞여있을 것이다. 목적은 달라도 표정은 닮았다. 설렘이 가득 괸 눈망울과 시간을 재촉하는 걸음걸이, 아마도 심장은 둥지를 떠나는 어린 새처럼 팔딱팔딱 뛰고 있으리라. 삶의 진풍경을 연출하는 이곳은 인천국제공항 여객터미널 출국층이다. “근무한 지 10년째이지만 지금도 여기만 오면 덩달아 떠나고 싶다”는 김기민 인천국제공항공사 홍보팀 과장. 그의 바람이 말해주듯이 2001년 3월 29일 개항한 인천국제공항은 지난..
시흥 늠내길, 직립보행 본능 일깨우는 사색의 길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사상가 루쉰의 말이 요즘 우리네 삶에서 입증되고 있다. 제주 올레를 시작으로 전국 골골샅샅 잎맥처럼 길이 생겨나 현대인의 고단한 삶에 양분을 담뿍 제공한다. 경기도 시흥 늠내길도 ‘수도권의 걷기 좋은 길’을 표방하며 작년에 개장했다. 시흥은 주변 인천, 부천, 안산, 안양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발이 늦었던 탓에 아직 자연부락이 많이 남아 있고 마을을 이어주는 옛길 또한 살아있다. 그 길을 엮어 숲길, 바람길, 갯골길, 옛길 등 총 4개 코스로 개발했다. 제1코스 숲길은 산자락과 산자락을 이은 길이다. “길이 생겼다는 얘길 듣고 15년 만에 여길 왔어요. 이 근처에 친정이 있었거든요. 옛날엔 항상 군자봉까지만 왔다갔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