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09/09

(14)
경운기를 타고 / 김정환 ‘피난보따리 만한 애정을 움켜쥐고’ 사람이 가난하면 이렇게 만나는 수도 있구나 털털거리는 경운기를 타고 너는 그쪽에서 나는 이쪽에서 오래도록 깊이 패인, 너의 주름살로 건너오는 터질 듯한 그리움이여 너와 나 사이를 가르는 삼팔선 같은, 먼지의 일렁임이여 그러나 우린 어쩌다 이렇게 소중한 사이로 서로 만나서 피난보따리만한 애정을 움켜쥐고 있느냐 움켜쥐고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느냐 설움이며 울화의 치밈이며 흔들리면서 그냥, 마구 흔들리면서 - 김정환 시집 창작과 비평사 문자메시지 신호음을 핸드폰 산지 3년 만에 처음으로 바꿨다. “와~ 쪽지다~”하는 앙증맞은 목소리다. 그랬더니 문자 올 때 왠지 더 반갑다. 주로 아침 첫 문자는 이팜과 초록마을이다. ‘한우 잡는 날, 사태 양지 특수부위 20% 세일, 단 하루’ 이런 광고가 애들 학교 보내고 나..
점쟁이의 말 할 말 못할 말, 들을 말 못 들을 말. 찬란한 말, 쓰라린 말, 참담한 말, 간절한 말, 희미한 말, 비정한 말, 흔드는 말, 맴도는 말, 다정한 말. 사는 동안 숱한 말의 숲을 통과한다. 도무지 그 말이 어려워 서성이기도 했고, 그 말에 채여서 주저앉기도 했고, 그 말이 따스해 눈물짓기도 했다. 그렇게 추억이란 말의 기억이다. 그리고 어느 시인의 말대로 모든 흔적은 상흔이다. 말끔한 잊혀짐은 없다. 누렇게 곰팡이 쓴 말들과 소화되지 않은 말들을 껴안고 한 평생 살아간다. 가끔 텅 빈 몸에서 말의 편린들이 덜컹거리면, 외로운 몸뚱이 안에서 들려오는 그 인기척이 반갑기까지 하다. 어느새 정이 든 게다. 9월의 드높은 하늘을 보니 점쟁이의 말이 떠오른다. 역술인 혹은 무속인. 신의 대리자를 자처하는 그들로..
전윤선 휠체배낭여행가 - 장애인 위한 '문화유산답사기’ 쓰고파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여행하면서 살고 싶다”고. 그 꿈이 이뤄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장애인이 되고서다. 이십대 후반 유전질환으로 휠체어를 타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길을 떠났다. 덕수궁부터 인도까지 휠체어로 가지 못할 곳은 없었다. 문턱은 깎고 벽엔 문을 냈다. 민원을 넣어 곳곳에 ‘길’을 냈다. 이제는 동료들의 손 맞잡고 떠나는, 휠체어 여행생활자 전윤선씨 이야기다. 여기는 서울대공원 장미원. 한 폭 상상화 같은 풍경이다. 하늘은 무구하게 파랗고 나무는 촉촉한 초록이다. 형형색색 장미꽃이 무리지어 만개했다. 꽃의 크기가 한뼘도 넘는 백장미 아이스버그, 분홍색 계통의 핑크피스, 붉은색 장미의 오클라호마, 보라색 계통의 블루문, 황색계통의 헨리폰다 등등 이름만큼이나 향기도 매혹적이다. 꽃대를 살포시 끌어다가 ..
몹쓸 동경 / 황지우 '더 오래 사랑하기 위해 그대를 지나쳐왔다' 그대의 편지를 읽기 위해 다가간 창은 지복이 세상에 잠깐 새어들어오는 틈새; 영혼의 인화지 같은 것이 저 혼자 환하게 빛난다. 컴퓨터, 담배갑, 안경, 접어둔 화집 등이 공중에 둥둥 떠다니고, 천장에서, 방금 읽은 편지가 내려왔다. 이데올로기가 사라지니깐 열광은 앳된 사랑 하나; 그 흔해빠진 짜증스런 어떤 운명이 미리서 기다리고 있던 다리를 그대가 절뜩거리면서 걸어올 게 뭔가. 이번 생에는 속하고 싶지 않다는 듯, 모든 도로의 길들 맨 끝으로 뒷걸음질치면서 천천히 나에게 오고 있는, 그러나 셀렘이 없는 그 어떤 삶도 나는 수락할 수 없으므로 매일, 베란다 앞에 멀어져 가는 다도해가 있다. 따가운 후두음을 남겨두고 나가는 배; 그대를 더 오래 사랑하기 위하여 그대를 지나쳐왔다. 격정 시대를 뚫고 나온 나에..
좋은 마주침과 나쁜 마주침 우리는 살면서 대수롭지 않게 선악을 판단한다. 좋은 날씨, 나쁜 날씨. 좋은 학생, 나쁜 학생. 좋은 노래, 나쁜 노래. 하지만 이것은 사물 그 자체의 본성이 아니다. 예를 들어 눈 오는 날은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에겐 나쁜 날씨이고, 눈싸움을 학수고대하는 꼬마들에겐 좋은 날씨일 것이다. 치매 걸린 시부모를 봉양하는 며느리는 시댁 식구 입장에서는 좋은 며느리이고, 그렇지 않으면 나쁜 며느리이다. 이처럼 사람들에게 일차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원인이 아닌 결과들이고, 사람들은 그 결과가 자신들에게 유용한지 여부에만 관심을 두고 판단할 뿐, 그것의 원인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선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것을 향하여 노력하고 의지하며 충동을 느끼고 욕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노력하고..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 / 안도현 '젖은 무릎을 생각한다는 것'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떨어져 앉아 우는 여치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여치소리가 내 귀에 와닿기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는 것 그 사이에 꽉 찬 고요 속에다 실금을 그어놓고 끊어지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 것 밤낮으로 누가 건너오고 건너가는가 지켜보는 것 외롭다든지 사랑한다든지 입밖에 꺼내지 않고 나는 여치한테 귀를 맡겨두고 여치는 나한테 귀를 맡겨두는 것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오도카니 무릎을 모으고 앉아 여치의 젖은 무릎을 생각한다는 것 - 안도현 시집 , 창비 뭇 남성동지들의 연인이 되어 독신으로 살 줄 알았던 선배다. 서른 중반에 같이 노동운동 하는 연하남이랑 결혼하고 아이없이 지냈다. 마흔이 넘으니 슬슬 아기가 눈에 들어온다고 했는데 아기를 가지려니 생기지 않았다. 두 번의 유산. 언니가 '유산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