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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오르는말들

저자는 특별하지 않다

 

 얼마 전 나의 책이 한 권 나왔다. 책을 썼다, 책을 냈다 같은 표현이 가능하겠지만 난 그걸 책을 낳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 세상에 없던 것이 있게 되기까지의 시간에 엄살을 부리고 싶어서다. 정말이지 출간은 출산처럼 지난하고 지루했다. 원고를 다 쓰고 나면 부족한 데가 보여서 다듬어야 하고, 이제 되었는가 싶으면 빈틈이 드러나 메워야 하는 식이다. 원고를 보고 또 보는 것 외에도 프롤로그, 에필로그, 저자 소개까지 쓰고 또 써야 하는데, 그 과정이 꼭 산통 같다. 괴로움이 끝날 듯 끝나지 않고 뭔가 완성될 듯 되지 않고 힘은 점점 빠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번 더 용을 써야 몸에서 무언가 쑥 빠져나온다.

제가 쓴 책이 나왔어요.” 나는 부르튼 입술로 가까운 이들에게 출간 소식을 알렸다. 아이를 낳았을 때처럼 격려를 받았다. 축하한다, 대단하다, 대박나라, 고생했다, 부럽다 등등. 문장형 말들은 간절했다. 나도 죽기 전에 책 한 권 쓰고 싶어요, 샘은 정말 열심히 사는 것 같아요. 그런 이야기들.

다들 열심히 사는데제가 외려 부끄럽네요.”

어설픈 책 한 권에 쏟아지는 전인적찬사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나는 황급히 둘러댔다. 책을 내기까지 힘든 건 맞지만 고생의 종류가 다를 뿐 그 정도의 노력 안 하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누구나 한발자국 더.를 외치며”(‘-성동혁)산다. 나를 축하해준 이들 면면을 봐도 그렇다. 공교육이 무너진 나라의 교사로서 아이들과 씨름하느라 몸이 축나서 병원을 들락거리는 그다. 평일에는 제안서에 회의에 모금에 온갖 업무를 해내고 매주 집회에 다니느라 주말을 반납하는 시민단체 활동가다. 20년 언론노동자로 일하며 매일 열정적으로 기사를 생산해온 사람이다. 해 떠서 해질 때까지 땅 일구고 농사짓느라 허리가 휘는 농부다. 그 치열함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들 노동은 일상으로 흩어진다. 책처럼 축적도 전시도 불가능하다.

문득 일전에 겪은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석사를 두 번이나 마친 후배가 다른 학문에 뜻을 두고 독일로 유학을 떠나기로 했다. 서른셋에 전공을 바꾸자니 불안하고 서른 넘도록 뭐했나 싶으니 자기가 한심하다며 푸념을 늘어놓더니만, “나도 언니처럼 결혼해서 애나 낳아놓을 걸 그랬어요한다. 나는, 허탈했다. 공부처럼 자격증이 안 나와서 그렇지 결혼과 육아도 고생을 넘어선 고행이라고 말해주었다. 일찍 귀농한 지인도 비슷한 얘길 했다. “다 때려치우고 농사나 지어야지라고 말하는 사람들 보면 어디 한번 ()해봐라 하는 심정이 된다고.

공부든, 육아든, 농사든, 출간이든, 장사든, 본디 사는 일은 간단치 않다. 나와 세상의 협응이 쉬울 리 없다. 그런데도 유독 출판은, 사유와 집필 노동의 성과물은 그 자체로도 번듯한 지위가 부여된다. 판매량에 비례해 사회적 위상이 수직으로 상승한다. 지식 노동 전반에 관한 우대 풍토는 교육을 중시하는 유교 문화와 생산성이 최고라는 산업사회 이데올로기가 만나서 형성된 독특한 현상이 아닐까 싶다. 내 비록 무명 작가지만 이번에 책을 내고 더욱 실감했다. 저자에게 부여된 과도한 권위와 선망을.

책을 내는 것, 그 자체가 선업일 수 없다. 특히 요즘은 특정 집단의 이익과 자기 정당성 확보를 위한 출판도 많고 쉽다. 그 경계와 판단은 모호하다.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책이 나왔을 때 주변에서 축하도 좋지만 그 책이 어떤 책인가를 따져 묻고 토론하는 인문적인 풍토가 형성되면 좋겠다. 책 낳는 일이 권력을 갖는 게 아니라 권력을 해체하는 일이 되도록 말이다.

 

*한국방송대학보에 실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