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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오르는말들

말실수가 아니라 말의 퇴행이다


4월 20일 장애인의 날에 열린 장애인 권리 증진 보장을 요구하는 집회에서 종로경찰서 모 경비과장의 발언이 물의를 빚었다. 모 경비과장은 집회 참가자들을 막고 있던 의무경찰들에게 “여러분도 장애인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장애인들은 안전한 위치로 이동시켜 달라”고 말했다. 모 경비과장은 또한 “오늘은 장애인들의 생일 같은 장애인의 날”이라고 발언해 참가자들의 공분을 샀다.

나는 기사를 보자마자 세월호 1주기 추모 집회에 간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세월호 인양과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집회가 밤늦도록 이어지자 경찰 측이 유가족들과 시민들에게 해산명령을 내리면서 밤이 늦었으니 어서 빨리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가슴 철렁했다. 어떤 사람들에게 가족의 품은 폐허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도 그렇다. ‘그날’ 이후 집은 휴식의 거처가 아니라 낯선 지옥의 공간이 되어버렸다고 호소한다.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나올 것 같아 있을 수가 없단다. 왜 아니겠는가. 세월호 희생자 가족의 고통스러운 처지를 한번이라도 생각했다면 나올 수 없는 말이다. 요즘 말로 영혼 없이 관습적으로 임무를 수행한 결과다. 그들에게 집회에 나온 사람들은 사연을 가진 개별자가 아니라 그냥 진압 대상인 것이다.


‘하루치의 전시가 끝나길 기대하며

인사말과 농담을 던지는 것이

세상의 관습이었다.’ (이수명 ‘어떤 관습’ 중)


장애인의 날 발언은 어떤가. 장애인의 날은 장애인을 동정하는 행사를 치르는 날이 아니다. 정부가 정한 ‘장애인의 날’을 ‘장애인차별철폐의 날’로 만들고자 420 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이 서울 도심에서 행진과 집회를 열었다. 휠체어를 탄 사람은 고속버스라는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못하는 현실, 집안에 화재가 나는데도 중증장애인이 몸을 움직이지 못해 그대로 죽어가는 현실을, 장애인들의 목소리로 알려서 장애차별이 사라질 수 있도록 기억하는 날이다. 차라리 생일보다는 기일에 가깝다. 아마 그 경비과장은 초인적 의지로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에게 꽃다발이 주어지는 관제 행사만을 보았기에 ‘생일’ 운운했을 것이다. 정작 자기 눈앞에 몰려있는 장애인들의 뒤틀린 육체와 당당한 목소리를 직시할 용기가 없기에 잘못하면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을 겁박용으로 사용한 것 같다.

이것이 비단 치안 권력만의 문제일까. 일상에서도 허드렛일을 하는 육체노동자나 노숙인을 가리키며 부모가 아이에게 “너 공부 안 하면 저런 사람 된다”고 말하는 장면은 모 경비과장의 말과 그대로 겹친다. 당신도 노숙인 혹은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누구나 사회적 약자의 자리에 갈 수 있다는 공감의 말이 아니라 내 몫을 지키고자 주변을 보지 않겠다는 배제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말실수가 아니라 말의 퇴행인 것이다.

이런 말들의 퇴행의 건너편에서 나는 또 다른 말들의 풍경을 목도했다.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시오. 5·18 엄마가 4·16 엄마에게’. 팽목항에 붙은 현수막의 글귀는 근래 본 가장 지극한 염려와 사랑의 말이다. 또 장애인(차별 철폐)의 날 행사장에서는 통쾌한 저항과 존재 선언이 나오기도 했다. “누구든 쉽게 쓰다가 버려질 수 있는 자본과 더러운 권력자들의 사회에서, 장애인은 애초에 폐기물 취급을 당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시설로 가야하고, 싸우면 경찰서로 가야 합니다. 어디로 가실래요? 경찰서요!”

 

 * 한국방송통신대학보에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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