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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오르는말들

단원고, 기억의 우물

엄마가 돌아가신 지 8년이 지났다. 아직도 친정 안방에는 엄마가 쓰던 재봉틀과 화장대, 소품이 그대로 놓여 있다. 영정 사진 앞에는 고인 앞으로 온 무슨무슨 단체의 우편물이 차곡차곡 높아간다. 첫 해에는 그랬다. 제아무리 무뚝뚝한 아버지라도 갑작스러운 마누라의 죽음에 허망하신가보다 했다. 나로서는 매번 울컥했다. 엄마의 물건을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리곤 했다. 3년이 지나도 그대로 있자 이제는 그만 정리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차마 말이 되어 나오진 않았다.

<한겨레> 신문에는 세월호 참사로 목숨을 잃은 단원고 학생의 소개와 부모의 편지가 매일 연재된다. 꼬박꼬박 챙겨서 보는데 저마다 아이들의 사연은 달라도 똑같이 반복되는 구절이 있다. “**, 엄마는 아직 네 방을 그대로 두고 매일 들어가본단다.” 눈물 아리는 대목이다. 나 같아도 아이의 방을 치우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8년 째 엄마의 물건과 동거중인 아버지의 심정이 이해되었다.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듯 정리는 아무나 때나 하는 게 아닌 거다.

지난달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 교실을 정리하는 문제로 논란이 잠시 일었다. 단원고 1·3학년 재학생의 일부 학부모들이 학교 정상화를 이유로 '교실 정리'를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론은 희생자 학생들이 명예 졸업할 때까지 교실을 보존하기로 했다지만, 논란 자체에 비애를 느꼈다. 아이들과 유가족에 대한 몹쓸 짓이라는 생각에서다. ‘정리라는 말은 얼마나 무지막지한지. 재고 정리, 인원 정리, 교실 정리일상에서 우리는 숱한 정리와 마주친다. 이 사회 시스템에 편입시켰다가 급격하게 폐기되는 것들, 그 성급한 인연의 말소 행위들이 서랍 정리처럼 대수롭지 않게 행해지고 있지 무언가.

속도 광증의 현대 사회에 정리는 선이고 기억은 악이다. 기억은 성가신 노릇이다. 과거의 집요한 응시이고 느낌의 활성화다. 대도시의 일상을 영위하는 자에게 이런 느려터진 정서 작용은 위험하고 불온하다. 어제처럼 오늘을 살지 않으면, 감히 느끼고 헤매고 허우적거리면 일상의 부도가 일어난다. 정시에 출근하고 노동하는 일과에 지장을 초래한다. 그래서 감정의 지출을 최대한 억제하고 기능적 역할에 충실히 복무하는 것을 미덕으로 배웠다. “슬퍼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말한 사람은 시인뿐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고자 애썼던 그, 윤동주.

잊지 않을게요. 세월호 참사 후 기침처럼 멎지 않고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말이다.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숙제가 남았다. 애초에 죽음을 삶으로 껴안는 재주를 타고 나는 사람은 없을 터다. 모든 배움이 그렇듯 스스로 깨치고 어깨너머로 익히는 수밖에. 나는 아버지가 엄마의 물건을 간직하는 것을 보듯 단원고 희생자 학생 교실이 보존되는 것을 마음 조이며 보고 있다. 함께 시간을 견디고 죽음을 실감하고 부대끼는 게 상실연습이지 싶다.

지나고 보니 그렇다. 일상의 자국 나고 때 묻은 것들을 성급히 떼어버렸을 때, 슬픔과 슬픔을 연결하는 끈을 끊어버렸을 때, 사람은 아픈 줄도 모르고 병든다. 괜찮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단원고 교실 같은 어둡고 휑한 현실의 구멍을 응시하고 지켜내지 않는다면 재난의 기억을 문화유산으로 삼지 못한다면 역사의 히스테리는 반복될지 모른다. 파국은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 우리에겐 한 사람의 죽음이 우리 모두를 진지하게 만들던/ 때가 있었다.”(김정환 그리고, 그러므로, 그러나부분) 이토록 빠르게 기억의 사막화가 진행되는 이 땅의 한 복판에서 단원고 교실은 우리 삶을 비춰보는 우물이 되리라 믿는다.

 

한국방송통신대학보에 실림. (R뷰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