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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오르는말들

서점에서 길 잃은 양 되기

 

좋은 책을 소개시켜 달라는 부탁을 가끔 받는다. 평소 대화가 많고 취향을 아는 사이라면 선뜻 권해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난처하다. 책은 기호품이거나 의약품이다. 배경 지식, 관심 분야, 자기 욕망, 독서 습관 등에 따라 또 현재 당면 과제와 자기 아픔에 따라 읽히는 책도 필요한 책도 다르다. 나의 좋음이 남의 좋음과 꼭 일치하지 않는다는 게 핵심. 그래서 나는 서점에 산책을 나가보라고 넌지시 권한다. 서가와 서가를 어슬렁거리면서 내 몸이 어떤 책에 반응을 보이는지 살펴보는 거다. 책들에게 책을 소개받는 셈이다.

이는 경험에 따른 조언이다. 나는 시를 좋아하는데 80-90년대는 주변에 시가 흔해 즐기기 쉬웠다. 당시 국민 시였던 서정윤의 홀로서기를 문학소녀들은 거뜬히 달달 외웠다. 인터넷 문화가 흥하면서 시의 열풍이 가라앉았는데, 마치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던 찜 닭집 간판이 교체되듯이, 시가 생활권에서 사라졌다. 더 이상 사람들은 시를 읽지 않았다. 나는 남몰래 시를 꼭 쥐고 있었다. 시를 읽을 때 영혼이 한들한들 피어나던 좋은 기억 때문이다. 서점에 갈 때마다 시집 서가에 갔다. 빽빽하게 꽂혀있는 시집들. 그 좁다란 책의 등에는 가장 곱고 정갈한 언어가 새겨져 있었다. 눈물이라는 뼈, 악의 꽃, 게 눈 속의 연꽃같은 시집의 제목들. 유혹하는 말들.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손이 가는 시집을 들춰봤다. 내키면 샀다. 막상 집에 와서 찬찬히 살펴보면 솜사탕처럼 볼품없이 쪼그라드는 시집도 있었고 별 기대 없었는데 통째로 필사하고 싶은 시집을 만나기도 했다.

낭독을 하겠습니다. 나는 이 책의 저자를 알지 못하지만, 킁킁 짐승의 냄새를 맡듯이 책의 숨소리, 문체의 숨결을 느낄 때, 내가 이 책을 쓰고 있다고 생각해요.”(김행숙 이책부분)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책들의 목록이 쌓이면 주변 사람들이 책을 자발적으로 소개한다. 가방에 항상 시집이 있는 걸 보고 이 시집도 읽어보라 권하거나 생일선물로 시집을 선물한다. 요즘처럼 인터넷 서점이 있어 책을 검색하면 관련 서적이 자동으로 뜨는 시스템은 아니었지만 아날로그식 귀엣말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를 중심으로 시가 모이면서 좋음과 덜 좋음, 그저 그러함이라는 느슨한 분류기준이 생겼다. 나만의 꿋꿋한 취향이 만들어진 것이다.

무려 1년 간 장기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책들이 있고 특정 영화가 천만 관객을 돌파하는 전체주의적 사회 분위기에서 자기선택을 만들어가기도 지켜가기도 쉽지 않다. 먹고사는 건 바쁘고 문화생할은 해야겠으니 가까운 데 손이 간다. 영화는 흥행영화로 책은 베스트셀러로. 하지만 대다수 국민이 보는 책과 영화는,그 발생 자체가 자기모순적이다. 대량생산 대량소비는 경제의 법칙이다. 문화의 핵심은 보이지 않는 것의 발견, 감정의 세분화, 다름의 향유다. 모든 감정의 평준화를 양산하는 집단관람 혹은 독서 현상은 결코 좋은 문화가 아니다. 반문화에 가깝다.

올해는 양띠해. 서점에서 길을 잃은 양이 되어보면 어떨까. 양이 풀을 뜯듯이 한가롭게 책을 뜯어먹고 고르고 후회하고 그 책을 징검다리로 또 더 좋은 책을 만나고. 그 과정은 시간낭비가 아니라 자기취향이 무르익는 시간이고 자기서사 만들어지는 고귀한 체험이 될 것이다. 고유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을 때 사회적 서정이 높아지고, 타자를 이해하는 감수성이 길러지고, 그러면 온갖 끔찍하고 야만적인 갑질 사건이 잦아드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싶은 요즘이다.

 

*한국방송통신대학보에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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