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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피의 샘 / 보들레르

이따금 나는 내 피가 철철 흘러감을 느낀다.

장단 맞추어 흐느끼는 샘물처럼.

긴 속삭임으로 흐르는 소리 분명 들리는데,

아무리 더듬어보아도 상처는 찾을 수 없다.

 

결투장에서처럼 도시를 가로질러

내 피는 흘러간다. 포석을 작은 섬으로 바꾸며,

또 모든 것의 갈증을 풀어주고,

도처에서 자연을 빨갛게 물들이면서.

 

취하게 하는 술에게 나를 파고드는

공포를 하루라도 잠재워달라고 나는 자주 하소연했건만;

술은 내 눈을 더욱 밝게 귀를 한층 예민하게 해줄 뿐!

 

사랑 속에 망각의 잠을 찾기도 했으나;

사랑이 내겐 오직 저 매정한 계집들이

내 피를 마시도록 만들어진 바늘방석일 뿐!

 

- 보들레르 <피의 샘>

 

 

 

지난 가을 내가 월급생활자로 취직했을 때, 주위 반응이 대개 비슷했다. 어떻게 이렇게 취직이 빨리되느냐, 마음만 먹으면 일자리를 구하느냐 등등. 부러움과 놀라움 섞인 말들을 뱉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내가 운이 좋은가 싶기도 했는데 별로 실감나지 않았다. 미지의 영역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 일은 나의 것이라는 직업의식이 형성되기 이전이었다. , 언제 그만둘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즈음 구직활동 하느라 이력서를 열군 데도 더 넣은 한 친구는 아예 대놓고 말했다. “쌤은 마음만 먹으면 바로 취직하잖아요. 전문직 여성이에요. 이제 탄탄대로예요. 고속도로 올라탔어요.” 본인이 취직에 어려움을 겪으니 내가 크게 보였겠으나, 그 표현의 과장됨 때문에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리고 말했다. “아이구, 무명작가가 무슨 전문직이야 -.- 그리고 인생에 탄탄대로가 어딨어.”

 

우리의 대화는 길어졌다. 그 친구가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것보다 계속되는 낙방으로 자신감을 잃고 자괴감에 빠지는 상황이 더 심각한 문제였다. 그 폭포처럼 쏟아지는 자기 비하와 현실 비관의 말들을 막을 길이 없었다. 나는 듣거나 말거나 너 괜찮아. 좋은 인재야를 무슨 주문처럼 반복했다. 전화를 끊고도 마음이 뒤숭숭했다. 자기가 처한 그 상황이 영원할 것 같을 때, 그 불안을 어찌 잠재울 수 있을까. 내가 아는 한 묘책은 없다. 외부에 새로운 변수가 오기 전까지는 견디는 수밖에.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얼마 후 취직을 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며칠 전에는 월급 타면 달려가려고 꾹 참고 있으니 기다리라고 한껏 들뜬 문자가 왔다. 그리고 전문직으로 부러움을 한 몸에 받던 나는,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처지가 됐다. 탄탄대로 고속도로에서 차가 서 버린 거다.

 

사연은 복잡한데 본질은 간단하다. 갑의 횡포, 을의 비애,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우리 회사에서 만들던 간행물을 만들지 못하게 됐다. 당연히 관행과 상식에 위배되는 일이고 아주 드물게 불합리한 상황이다. 그 피해가 하청업체의 일원인 내게까지 온 거다. 불의에 나름은 저항하며 살았던 나로서는 이대로 무기력하게 당해야하는 건가, 본사에서 일인시위라도 해야 하는 건가 잠시 고민했다. 그러려다 말았다. 자고로 에도 급이 있다. 너무 쩨쩨하고 시시했다. 가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대표님이 당분간 회사가 정상화될 때까지 프리랜서로 일하며 당분간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듣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또 후두둑 떨어졌다. 가장에게는 고정급이 필요하다는 진리가 어느 새 나의 신체에 각인된 모양이다.

 

가슴 답답한 날들이 흘렀다. 지난가을 월세 마련을 위해 일감 찾을 때 얘기해두었던 출판사선배한테 전화가 왔다. 단행본 편집 일을 의뢰하려 한다고 했다. 당연히 응했다. 죽으란 법은 없구나, 감사하면서. 또 우리 회사가 당한 기막힌 일을 알게 된 어떤 분이 도움을 주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향후 나의 행로는 어떻게 되는 건지 물었고, 나는 문필하청 관련 일 환영한다고, 마땅한 일감 있으면 부탁한다고 했다. 그리고 1분 만에 후회했다. 구걸하는 처지가 된 거 같아서다. 남에게 부담을 주는 거 같아서다. 나는 울컥함을 어찌하지 못하고 왜 이렇게 슬프고 구차한가요문자를 보냈다. 답이 왔다. 마음만 남루하지 않으면 괜찮은 거라고 생각하라고. 우연히, 혹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알아보겠다고. 그리고 말했다. ‘돌봄은 우주를 돌고 돈다고 하죠.’

 

니체가 남을 동정하고 연민할 때는 섬세한 기예가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이런 거였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쟤한테 받은 건 얘한테 줘도 되니까. 지금 받고 이따 줘도 되니까. 돌봄의 우주적 순환의 원리가 수건돌리기처럼 재밌고 흥미로운 이 세계의 운동으로 이해됐다. 그러고 보니, TV프로그램 <사랑의 리퀘스트>처럼 나에게 답지하는 온정의 손길로 나는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 학력자본 화폐자본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내가 밥 먹고 사는 건 누군가의 지극한 돌봄에 덕분이었구나, 깨달았다. 신세 한탄 그만하고 나의 돌봄은 어디를 어떻게 향해야하는가를 연구해야겠구나, 마음 다잡았다. 그런데,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글픔은 긴 속삭임처럼 흘러다녔다. 난방비 폭탄이 나온 관리비 고지서 앞에서는 그토록 아름다운 이론도 힘을 잃는다. 본디 이데아적 세계는 감각의 세계 앞에서 무기력하다. 바람 앞에 등불처럼 흔들리면서 꺼지지도 못하는 질긴 이 생. 바늘방석 같은 사랑. 때로는 망각의 잠을 청하고 싶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