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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감각 / 랭보

 

여름 야청빛 저녁이면 들길을 가리라,

밀잎에 찔리고, 잔풀을 밟으며.

하여 몽상가의 발밑으로 그 신선함을 느끼리.

바람은 저절로 내 맨머리를 씻겨주겠지.

 

말도 않고, 생각도 않으리.

그러나 한없는 사랑은 내 넋속에 피어오르리니,

나는 가리라, 멀리, 저 멀리, 보헤미안처럼,

계집애 데려가듯 행복하게, 자연 속으로.

 

 

 

- 김현 옮김, <지옥에서 보낸 한 철> 민음사

 

 

 

 

날씨가 풀려서 아이폰이 생겨서 음악을 들으면서 출근길에 지하철역까지 걸었다. 마을버스로 네 정거장. 이십분 정도 걸린다. 찰흙으로 빚은 것처럼 귀에 착 들어맞는 이어폰으로 들으니 음악이 찰지다. 차들이 지나가는 소음이 완전 차단되고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길이 쭉쭉 열렸다. 2월의 쌀쌀맞은 아침 공기가 뺨을 어루만지고. 여기가 영화 촬영장이고 카메라가 나만 비추기라도 하는 것처럼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조여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벽에서 뽑힌 못이 바닥에 뒹굴듯이 나만 세상에서 쏙 뽑혀버린 느낌도 들었다. 뭐든 좋았다. 말도 않고 생각도 않고. 느낌만 가득. 이게 하이데거가 말한 '인간은 땅 위에 시적으로 거주한다'는 것이로구나 싶었다. 내가 이해하는 시적인 것은 느낌의 끝에 이르는 것이다. 이이언의 낮고 음울한 목소리는 아침 8시의 대책없는 눈부심도 컴컴한 밤으로 만들어버린다. 외로운 내적환경에 최적화된 목소리. 언제부턴가 어떤 정서 상태로 나를 데려다 놓는 것들에 맥없이 끌린다. 충만한 느낌상태에서 왕성한 생명활동을 자각하기에 그런가. 이 또한 생의 에너지를 갈망하는 노화의 징후일까.

 

글쓰기수업을 시작했다. 오늘로 벌써 3주차다. 슬슬 도반들의 표정이 눈에 들어오고 정이 들려 한다. 한주 한주 글이 한편씩 더해질 때다마 감정이 한 겹씩 쌓여가는 관계의 형성 과정이 더없이 신기하고 소중하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만나서 책을 읽고 생각을 전하고 서로의 글을 읽고 감정의 결을 맞춰가면서 진심어린 인생 비평을 해나간다. 소외된 노동을 하느라 오래토록 웅크리고 쪼그렸던 자기 펼침의 시간. 공포감과 해방감의 에너지가 강의실 안에 자욱하다. 20여 명의 감각과 지능과 정서의 고도의 몰입 상태. 후끈하다. 삶의 사연들이 이어폰 끼고 듣는 음악처럼 살갗을 파고든다. 그걸 듣노라면, 문득 혼자인듯 외롭다가 아프다. 수업이 끝나면 배고프다. 예전에 아기 젖먹일 때도 그랬다. 주사바늘로 채혈 당하듯 5대 영양소가 일시에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고 아기가 천사같다가 괴물같았다. 모유수유가 끝나면 실제로 물이나 우유를 벌컥벌컥 들이켜야했다. 그러면 새로운 피가 채워지곤 했다. 글쓰기수업도 존재와 존재가 이어져서 민낯을 마주하고 희비의 감정을 나누고 감각을 일깨우고 삶의 양분을 나누는 일이다. 그래서 배가 고픈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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