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사 처마끝 양철 물고기를 건드는 눈송이 몇점,
돌아보니 동편 규봉암으로 자욱하게 몰려가는 눈보라
눈보라는 한 사람을 단 한 사람으로만 있게 하고
눈발을 인 히말라야 소나무숲을 상봉으로 내려가 버린다
눈보라여, 오류없이 깨달음 없듯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사람은 지금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다
무등산 전경을 뿌옇게 좀먹는 저녁 눈보라여,
나는 벌받으러 이 산에 들어왔다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눈보라 눈보라
더 추운 데 아주아주 추운데를 나에게 남기고
이제는 괴로워하는 것도 저속하여
내 몸통을 뚫고 가는 사람소리가 짐승같구나
슬픔은 왜 독인가
희망은 왜 광기인가
뺨때리는 눈보라 속에서 흩어진 백만 대열을 그리는
나는 죄 짓지 않으면 알 수 없는가
가면 뒤에 있는 길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앞에 꼭 한 길이 있었고 벼랑으로 가는 길도 있음을
마침내 모든 길을 끊는 눈보라, 저녁 눈보라
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 말한다
- 황지우 시집 < 게눈 속의 연꽃 >, 문학과지성사
아침 출근 길, 눈이 내렸다. 펑펑 쏟아지는 눈보라를 뚫고 지나가면서 '눈보라'가 생각났다.
슬픔은 왜 독인가, 희망은 왜 광기인가...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 말한다...
황지우 오빠께서 낭독하는 시를 듣자니 - 교장선생님 말씀 같긴 하지만 -
시의 다른 구절이 들어온다.
'나는 벌 받으러 이 산에 들어왔다'
무등산으로 자기 유배를 간 시인이 바라보았을 눈송이들. 하염없는 슬픔과 회한 덩어리였을 그것들.
그러면서도 처음부터 다시 걸어오라는 말을 듣다니. 역시 시인은 이 세상이 절망이라고 말하지만
절망에 파묻히지는 않는다. 절망을 말한다는 것은 절망과의 최소한의 거리가 확보되었다는 뜻이니까.
절망의 끝까지 가서 모든 길이 끊긴데서 만나는 자유가 있을 것이다. 눈보라 같은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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