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어항에. 외롭게 커다란 물속을 지키던 납싹이. 다른 물고기들처럼 곧 죽겠지 싶어서 방치해두었는데 오래토록 쌩쌩했다. 쓸쓸할까봐 친구 3마리를 사다 넣어주었더니 새끼를 낳기 시작했다. 열마리, 스무마리, 오십마리, 백마리... 기하급수적으로 늘어서 어느 순간부터는 인구조사를 포기했다. 그 잔멸치만한 새끼들을 꽃수레는'신납이'라고 부른다. '신생어+납싹이'라는 뜻이란다. 신납이는 작은 어항에 별도로 보관한다. 그 중에 '중싹이'로 자라서 꼬리에 무늬가 생기고 화려한 지느러미를 자랑하는 어엿한 성체가 되면 큰 어항으로 옮긴다. 딸아이의 오매불망 지극정성 보살핌 끝에 지금은 신납이 170여마리, 구피 10여마리가 되었다. 꽃수레의 납싹이나라. (왼쪽 상단의 꼬리 큰 물고기가 납싹이다)
수레는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눈을 감을 때까지, 주로 납싹이들과 시간을 보낸다. 10마리 구피는 각각 고유의 이름이 있다. 등싹이 흥싹이 율싹이 마싹이 율마 납싹이 꼬리흑이 등등. 어항에 바싹 붙어서 바라보거나 이름을 호명해가며 종알종알 대화한다. 누가 보면 정신이 약간 이상한 아이로 볼 여지가 다분한 행동인데 제법 신통력과 설득력 있는 사례도 발생한다. 지난주 목요일에는 연구실 수업 중에 연락이 왔다. 평소에는 그 시간을 피하는데 무슨 급한 일인가 싶어, 쉬는 시간에 전화했더니 목소리가 방방 들떴다.
"엄마. 등싹이가 배가 뚱뚱하잖아. 근데 배가 홀쪽해진거야. 그래서 내가 등싹이한테 너 새끼 낳았냐고 물어봤더니 그렇대. 그래서 아치를 들어봤더니 거기에 신납이가 우글우글해!"
출산소식이다. "어머 잘 됐구나!" 말은 했지만 사실 나로서는 그닥 반갑다고만 할 수 없다. 납싹이 일가가 번식할수록, 어항 닦고 물 갈아주고 밥 주고 관리하는 일거리만 는다. 행여나 잘못해서 한 마리라도 놓칠 세라 딸아이 감시가 철저하다. 며칠 전, 어항 물 갈 때다. 내가 좀 귀찮아하니까 직접 말은 못하고, 딸아이는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아빠 오면 물 갈아야지.." "납싹이들 물이 너무 더러워서 어떡하지"를 반복했다. 눈치를 보는 게 안쓰러워서 큰 맘 먹고 "엄마가 갈아주겠다"고 나섰다. 망국자로 물고기를 다 건져놓았고 어항을 들려고 했더니 딸아이가 어항에는 아직 신납이 2마리가 남아있다는 거다. 지난번에 작은어항으로 미처 옮기지 못했던 것들이라고 했다. 그래서 아치도 꺼내고 큰 바위동굴도 치우고 아무리 살펴도 없었다. "다 옮겼나보다 어서 하자." 그랬더니 딸아이는 아니라고 "틀림없이 있다"고 울먹였다. 용산 참사의 가슴 아픈 대사가 생각났다. "여기 신납이 있다"
내가 무슨 철거용역업체가 된 기분이었다. 어디 그럼 신납이를 같이 찾아보자고 했다. 한 5분여 흘렀을까. 아무리 요리보고 저리보아도 없었다. 나는 도저히 안되겠다면서 어항을 들려고했더니 딸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멈칫했다. 잠시 후. "여기 있잖아. 신납아!!!!!!!" 어항에는 기적처럼, 실오라기 같은 납싹이 두 마리가 헤엄쳐 나왔다. 딸아이는 엉엉 울었다. 하마터면 신납이 하수구에 떠내려가서 죽을 뻔 했다며...두 주먹 쥐고 눈물을 닦아내는 딸아이를 보자니 내가 무슨 시험에 든 것 같았다. 이건 뭐 종교적 간증도 아니고, 참내.
나에겐 해치워야할 노동이고 딸아이에겐 생명을 돌보는 일이었다. 나는 납싹이의 주거환경 개선보다는 그저 책 읽는데 방해되니까 빨랑 끝내버리려는 마음이 컸다. 막판에는, 뭐 신납이가 백마리도 넘게 있는데 두어마리 없어도 무방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물고기가 안 보였을 거다. 원래 보고싶지 않으면 안 보인다. 책 읽을 때도 시간에 쫓길 때 내용이 눈에 안 들어온다. 빨리 핵심파악을 했으면 좋겠고 발제는 해야하고 결론을 내버리고 싶어서 조바심날 때, 텍스트와 멀어진다. 같은 이치일 거다. 어항 물갈기도 책 읽기도 이렇듯 성급히 대하는 것을 두고 니체는 '노동의 시대'라고 일침했다. "성급하고 품위없이, 비지땀을 흘리면서 곧장 해치우는 속전속결의 시대" 병증이라는 거다. 신납이 실종소동으로 한 가지 배웠다. 해치우지 말자.
이리도 부족한 게 많은 에미이거늘, 딸아이는 나의 장점만 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없는 것도 만들어낸다. 지난번 '11월 자식사랑상'을 준 수레는 이틀 후 '엄마의 장점'이라는 문건을 써주었다. 내가 거의 마더테레사와 신사임당의 합체 인격으로 묘사됐다. 아들이 휙 보더니 '완전 미화됐다'고 비웃었다. 내가 봐도 웃긴데 특히 12번이 압권이다. 자식사랑 상장을 받더니 더 받으려고 노력을 한다. ㅋㅋ 그리고 어제. 딸아이는 새해 첫날 채 하루를 살기도 전에 '1월 자식사랑 상장'을 슥슥 그려주었다. 그것도 '최우수'라는 타이틀까지 생겼다. 연말에 방송3사 시상식을 섭렵하더니만 그 여파인 듯싶다. 최우수 부문 수상자답게 품위있게 살자. 생명의 소중함과 느리게 산다는 것의 가치를 일깨워준 꽃수레와 납싹이들에게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