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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오르는말들

12월 셋째주 단상들


#  나는 남자들과 불화하는 존재인가. 그것이 요즘 나의 화두다. 프리랜서 때도 지금 연구실도 더 거슬러 예전에 노조일 할 때도 주로 남자들과 일한다. 여러모로 죽이 맞아서 친하게 지내다가도 꼭 어떤 지점에서 부딪힌다. 실망한다. 내 성격이 이상하고 유난하여 그런지도 모른다. 일정 부분 별스러움이 작용하겠지만, 인격 대 인격이라기보다 젠더문제로 읽힌다. 여자들에게는 느껴본 적 없는 못마땅함이 온몸으로 전해져오므로 그렇다. 통칭 남성적인 것들. 정복하려는 욕망, 추월하려는 습성, 자기중심적인 태도 등등. 남근주의나 영웅주의로 대변되는 권력지향적 성향들. 남자들은 사람은 안 보고 일만 본다. 그럴 때 약한 것, 작은 것은 수단시 된다. 나도 안다. 남자의 눈에는 안 보인다는 사실을. 생존에 지장 없는 감각기관은 발달하지 않으니까 종적으로 미숙한 거다. 더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못 본척도 할 것이다. 높은 성취에 대한 동경. 성과와 달성과 인증을 좋아하는 무리들 아닌가.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어떤 사실을 안다고 해서 이해되는 건 아니다. 남자들의 무감각과 단순함에 한번씩 기겁한다. 하룻밤 지나면 까먹지만, 여러 날 우울하기도 하다. 거의 남자들과 지내고 남자가 쓴 책과 통정하고 남자가 연주하는 음악에 탐닉하면서, 젠더범주로서 남자와의 거리는 좁히지 못한다.

# 저녁 먹고 딸내미랑 분리수거 하러 나갔다가 놀이터에 들렀다. 운동기구를 돌리면서 딸이 묻는다. "엄마, 우리반에서 나랑 진희가 제일 순하다."  "그래? 누가 그래?"  "친구들이 그렇대."  "그런 평가에 대한 니 생각은 어떠니?좋아?"  "아니. 나는 내가 야무지면 좋겠어. 다솔이처럼. 엄마. 어떻게 해야 야무져지는 거야?" "음...좋고 싫음에 대한 자기 생각을 분명히 표현하고 자기 할일을 완벽히 해내고, 또...너도 야무져." "아니야. 나는 내가 흐리멍텅한 거 같아. 엄마, 선생님이 그러는데 너무 자기 생각 없이 남의 말만 따르면 안 된대."  집으로 가는 길. 딸아이는 '당나귀와 소금장수'라는 우화를 들려주었다. 줏대없이 살면 안 된다는 교훈과 함께. 재미와 감동이 동시에 밀려왔다. 깨달은 바가 커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딸아이는 선생님 말씀을 스폰지처럼 받아들이고 마음의 양식으로 삼는다. 어떤 점에서 자기를 흐리멍텅하다고 느끼는지 궁금했지만 더 캐묻지 않았다. 나도 어릴 때 순둥이에다가 우유부단 캐릭터였고 그게 좀 답답했던 기억이 있다. 아이들이 표현이 서툴어서 그렇지 온전히 느끼고 생각한다. 저 작은 몸뚱이에서도 여러 충동들과 감성들이 콩나물처럼 고개를 내밀고 쑥쑥 자라고 있다.  

# 나는 학자타입의 인간형은 아니란 걸, 예전에도 알았지만 최근에 더 절실히 체험한다. 하루종일 책상에 앉아있으면 숨이 막히고 어지럽고 토쏠린다. 아주 그냥 옥살이가 따로 없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사유 중의 사유'라고 불린다. 니체철학의 핵심인데 니체가 운만 띄워놓고 아파 버리는 바람에 그가 정립한 이론이 없다. 단서만 갖고 추론할 뿐이다. 오해와 착각으로 얼룩진 사상. 영원회귀. 니체주의자들 사이에서도 해석이 분분할 정도로 난해하다. 그걸 자료를 좀 찾아보려고 책과 씨름하다가 완전 병들었다. 신체기운이 내리막길로 치닫고 매사 짜증스럽고 예민해졌다. 어떤 목적에 사로잡히니까 나머지 것들에 대해 배타적이 되었다. 밥하기도 싫고 자식도 방해물이고 전화도 귀찮고. 다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폭력적인 망상에 사로잡혔다. 심신의 피로가 몰려와 일찍 잠들어버렸다. 책은 양껏 봤어도 충만보다 허탈. 산 것 같지가 않았다. 하루를 공친 느낌이 지배했다. 글 쓰느라 책상에 오래 붙어있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이게 뭐람. 목소리의 활기, 정신의 윤기 다 잃었다. 저마다 자기 삶에 맞는 공부방법과 배합비율이 따로 있는가 보다. 물론 한계지점을 돌파하지 못하면 새로운 사유회로는 뚫리지 않는다. 그래도 전체적인 맥락에서 살펴야겠다. 감각 세포가 하나하나 깨어나는가. 하나하나 꺼져가는가. 나를 가볍게 해주는가, 무겁게 짓누르는가. 이상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공부하는데 공부하다가 이상한 사람되는 일은 없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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