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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생활 / 김수영


시장거리의 먼지 나는 길옆의
좌판 위에 쌓인 호콩 마마콩 멍석의
호콩 마마콩이 어쩌면 저렇게 많은지
나는 저절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모든 것을 제압하는 생활 속의
애정처럼
솟아오른 놈

(유년의 기적을 잃어버리고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갔나)

여편네와 아들놈을 데리고
낙오자처럼 걸어가면서
나는 자꾸 허허...... 웃는다

무위와 생활의 극점을 돌아서
나는 또 하나의 생활의 좁은 골목 속으로
들어서면서
이 골목이라고 생각하고 무릎을 친다

생활은 고절(孤絶)이며
비애이었다
그처럼 나는 조용히 미쳐간다
조용히 조용히......



- 김수영 전집, 민음사


보살님 같았다. 온화한 표정. 잡티 하나 없는 무욕의 피부. 넉넉한 말투. 세미나 첫날부터 앉아계시는 그곳에 편안한 파장이 흘렀다. 수선문. 화두를 아이디 삼으셨다고 소개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시인, 불교적 세계관이 투영된 문태준의 언어를 어렵지 않게 풀어주셨다. 삶의 지혜가 바로 이런 것. 우리는 감탄했다. “하루하루 애들 키우고 밥 해먹고 하다가 어느 날 돌아보면 훌쩍 이 나이가 돼있어요. 그런 게 멍한 거죠.” 여자의 삶. 조곤조곤한 말투에서 느껴지는 쓸쓸함은 더 컸다. “토요일에 외출이 얼마만인지 몰라요.” 세상에 처음 나온 어린 새 같은 표정. “공부방을 이십년 운영했어요. 그러다보니 아이들하고만 지내고 어른과 대화하는 법을 까먹더라고요.”

말을 배우겠다는 어른. 말 부족은 물 부족만큼 심각한 생의 사태. 헌데 김수영 시가 어려워서 괜히 발을 들여 놓았구나, 가지말까보다 망설였고 여기서 그만두면 영영 못할 거 같아 나왔다고 터놓았다. 그녀는 유일하게 이해가능한 시 한편이라며 <생활>을 낭독한다. “모든 것을 제압하는 생활” “나는 조용히 미쳐간다.” 어제, 토요일 낮에 전화가 오셨다. 시어머니가 중환자실에 입원했고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병원을 지키는데 평일에 일을 하니 주말은 당신 차지가 되었다며 시세미나에 당분간 참석이 어렵겠다고. “어머니 퇴원하시면 다시 돌아갈 테니 저 자르지 말아주세요. 호호호...” 자꾸 허허... 웃는 그녀에게, 나는 얼마든지 언제든지 편안히 오시라고, 기다리겠다고 말하고는 끊었다. 무언가 서글펐다. 생활은 고절이고 비애이고. 그렇다고 쳐도.

그러니까 묻고 싶은 거다. 왜 여자는, 사람은 시 한편 읽고 살기가 이리도 힘이 드는가.  

올해 각종 연말모임, 토요일 약속은 다 접으려 작정했다. 별다른 선약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나마도 다 피하고 조용히 지내려했다. 하나의 난관은 예상했다. 대시댁 모임. 일찍 닥쳤다. 시댁 어른 팔순잔치가 토요일 저녁에 잡혔다. 남편한테 양해 및 협조를 구했다. 어차피 뷔페라서 어수선하니까 어른들께 인사만 드리고 조용히 사라지겠다. 그리고는 그리했다. 어머님께 중요한 일이 있다며 말하고 나오는 길,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내가 많이 용감해졌구나 스스로를 대견히 여겼다. 내가 만일 돈 버는 며느리였으면 말하기가 좀 수월했을 텐데 표면적으로 백수상태이다 보니 참 입지가 애매하고 표현이 궁색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으로 환원되지 않는 가치는 설명할 길이 막막하다.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