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인왕산 자락에는 작은 동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다. 통인동, 옥인동, 누상동, 누하동, 체부동 등 골목길을 돌 때마다 지명이 바뀌는데 이 일대를 경복궁 서쪽이라 하여 ‘서촌’이라 칭한다. 이곳엔 한옥 300여 채와 사대문 안의 유일한 재래시장인 통인시장이 남아 있다. 개발과 속도를 피해간 도심 속 ‘올드타운’이다. 고풍스러운 멋을 간직한 서울의 시골길을 걸었다.
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 10여분 가면 왼편으로 ‘통인시장’ 간판이 보인다. 천장에는 눈비를 가리는 둥근 아케이드가 있고 통로 바닥은 매끈하게 다져놓은 신식 재래시장이다. 건어물, 채소류, 잡화류, 쌀, 떡볶이, 반찬을 파는 소형점포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가게 안쪽 온돌마루에는 꽃무늬나 땡땡이무늬 티셔츠에 보풀 일어난 카디건을 겹겹이 걸치고 목도리를 둘러맨 다음 원색의 긴 앞치마로 패션을 마무리한 아주머니들이 나른한 오후 2시의 가게를 지키고 있어 정겨움을 더한다. <신진 떡 방앗간> 김혜순 씨(55)는 가래떡을 기계에 넣어 금은보화처럼 쏟아지는 떡국떡을 비닐에 담고 있다.
“여기서 아들을 키워서 장가보냈어요. 오래 됐죠. 방앗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할 일이 무척 많아요. 바빠서 신앙생활도 못하죠. 친척들은 제가 주님을 안 믿어서 못사는 거라고 말해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할 일이 태산인데. 어떤 때는 평생 이 고생을 해도 모아 놓은 것도 없어 속상하지만, 그래도 또 우리가 갈 때는 빈손으로 간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요.”
금세 얼굴이 환해지는 김씨. 매순간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극진히 살았던 걸까. 일찍이 자기정리를 마친 표정만큼 가게 내부도 정갈하다. 구식 석발기도 떡을 치는 판대도 먼지 한 톨 얼씬대지 않는다. 유리가 떨어지고 가장자리에 녹이 쓴 낡은 저울이건만 저울대는 반들반들 윤이 난다. 곳곳에 살뜰한 손길이 닿아있다. 떡을 만들 때는 내 손자 먹일 것이라 여기고 정성을 다한다는 김씨. 그래서 <신진 떡 방앗간>에는 무지개떡이 없다.
“색소를 쓰는 떡은 가급적 안 만들려고 해요. 요즘 애들 아토피가 많은데 몸에 안 좋으니까 넣지 말아야죠.” 그제야 TV위의 손자 사진이 눈에 든다. 방앗간을 나오자 건너편 가게에도 아기 돌 사진이 태극기처럼 크게 걸려 있다. 아마도 무사한 그날그날을 잇대어 생명을 품고 기른 시장사람들이 내건 자랑스러운 훈장이리라.
복사꽃 뺨 발그레하던 새댁을 손자사진 간직한 젊은 할머니로 만든 통인시장은 일제강점기에 통인정 공설시장으로 개설하여 1960년 이후 자연발생적 골목형 시장으로 변했다. 06년 새단장을 하여 재래시장 고유의 비릿하고 질척함은 사라졌지만 곰삭은 손맛과 인정은 구석구석 살아 있다. 통인시장 명물 기름떡볶이, 감자탕, 모듬전 등은 입소문을 타고 ‘맛집’의 입지를 굳혔다. 접근이 수월해 일부러 찾는 이가 많다.
시장통 중간은 마을로 통한다. 발길 닿는 대로 빠져나오면 연결된 동네마다 보여주는 풍경이 조금씩 다르다. 대체로 한옥과 연립주택이 어우러져 있다. 체부동 방면은 유일하게 처마 끝으로 너울너울 이어진 한옥골목길이다. 집들이 아담하다. 기교는 없으나 소박하고 예스러운 고졸한 멋이 있다. 이웃한 북촌의 풍채 좋은 한옥에는 양반이 살았고, 이곳 서촌은 중인들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누대로 이어온 서민적 정취가 배인 것이다. 시장 골목에서 가까운 한옥에는 ‘얼음’ ‘옷 수선’ 등 간판도 눈에 띈다. 사람 사는 모습 매한가지 일 터이지만, 그래도 궁금하다. 나뭇결이 살아 있는 저 대문의 묵직한 문고리를 밀면 기와지붕 아래에서 어떤 삶이 펼쳐질까.
“한옥에서 살면 숨 쉬기가 좋아요. 자고 나면 편안해요. 흙냄새 나무냄새 나니까요. 한옥이 춥고 불편하다는 건 옛말이에요. 보일러 틀면 후끈해서 이불을 걷어차고 자는 걸.”
서른한 살에 서대문의 이만오천원짜리 방에 터를 잡고 서울살이를 시작한 박정남 씨(73)는 줄곧 인왕산 부근 한옥에서 살고 있다. 15년 전 집 앞에 큰 길이 나면서 집이 헐리는 통에 지금 사는 옥인동으로 이사 왔다. 박씨의 집안 곳곳은 시골집의 정취가 물씬하다. 기역자 툇마루 한쪽에는 정월대보름에 쓸 마른나물 불린 옥색 대야가 놓여 있고 다른 한쪽에는 누런 메주가 층층이 쌓여있다. 조만간 볕 좋은 장독대의 항아리 속으로 들어갈 것들이다.
“여태껏 장은 직접 담가 먹었죠. 작더라도 마당이 있어서 별거 다해요. 장 담그고, 김장 때 배추 씻고, 여름에 등목하고. 또 여기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하늘도 보이고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 새소리가 들리니까 얼마나 좋아요. 자연속이죠. 예전에 여기에 살았던 부자들이 전부 강남으로 이사를 갔는데 요즘 다시 이사 오려고 해요. 살아보니 한옥이 좋거든. 외국 사람들도 한옥 보여주면 아주 놀래자빠져요.”
남다른 자부심이다. 이유가 있다. 박씨의 직업은 한옥문화재기능공이다. 지난 40년 한옥에 살며 한옥으로 밥벌이를 했다. 주로 50~60년 된 한옥을 고치다보니 케케묵은 먼지가 머리 위로 떨어져 머리카락이 죄다 없어졌다며 모자를 벗어 ‘40년 한옥지킴이’로 헌신한 당신의 삶을 증명한다. 봄이 오면 골목길 담벼락 작은 화단에 갖가지 꽃을 심을 예정이라는 박씨. 특히 앞집 나뭇가지와 연결해 놓은 장미가 피면 기가 막히게 예쁘다고 자랑이다. 좁고 누추한 골목이 머지않아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로 옷을 갈아입는다. 벌써부터 코끝이 향기롭다.
- 야곱의 우물 2010. 4월호
* 원고가 넘쳐 쓰지 못했는데 <오감도>에서 ‘길은 막다른 골목길이 적당하오’라고 노래했던 시인 이상도 서촌에 살았다. 지금은 아쉽게도 지붕만 보인다. 시인 윤동주의 하숙집, 노천명·이중섭의 집 등 근대 예술가들의 자취가 곳곳에 서려있다. 길가에는 세종대왕이 태어난 집터가 있다. 기상과 풍류와 운치가 흐르는 서울의 시골길이 북극의 얼음처럼 조금씩 사라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