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우리가 알에서 깨어나는 새가 되는 거야.” 마루를 뒤덮는 살굿빛 커다란 천속에는 열 명 남짓의 아이들이 몸을 웅크린 채 모여 있다. 깊은 정적 속에 잔잔한 선율이 깔리는가 싶더니 아이들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설핏 밖으로 새어나온다. 이불 뒤집어쓰고 잡기놀이라도 하는 양 마냥 좋은 이 아이들은, 오는 6월 6일 국제현대무용제 초청공연을 준비하는 필로스장애인무용단원들이다.
몸동작 따라하고 소통 가능한 장애아동 선발
필로스장애인무용단은 2005년 11월 대림대학의 ‘장애아동 무용체육교실’에서 출발했다. ‘누구라도 무용을 통해 감정과 의사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임인선 교수(사회체육학과)의 소신에 따라 장애아동을 위한 무용체육교실이 열린 것.처음엔 대림대학 소재지인 안양 거주 장애아동 27명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1년의 과정을 마치면서 ‘강강수월래’를 무대에 올렸는데 이 공연이 공중파 뉴스에 보도되는 등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이후 “무용을 더 배우게 해달라”는 기존 학부모의 요청과 “우리 아이도 무용을 배울 수 없느냐”는 문의에 따라 ‘영원히 졸업하지 않아도 되는 무용단’을 2007년 3월 창단했다. 무용단은 주로 지적장애 또는 다운증후군을 앓는 신체적·정신적 발달이 늦은 9세에서 15세을 대상으로 오디션을 통해 뽑는다. 오디션은 선생님의 몸동작을 따라할 수 있는지, 대화가 가능한지 등을 본다.
“장애인들이 어떻게 무용을 하느냐고 우려합니다. 하지만 무용은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신체로 표현하는 행위죠. 무용이 얼굴 하얗고 몸매 가늘고 예쁜 비장애인의 전유물이란 편견을 깨고 싶었어요. 오히려 무용은 몸이 불편하고 마음이 힘든 사람에게 더 필요합니다. 신체 동을 통해 감정을 표출하고 감정을 순화, 정화 시키면서 신체 기량도 높이고 사회성 발달도 도모할 수 있지요. 우리 아이들을 통해서 무용의 힘을 다시 한 번 확신했어요.”
임인선 단장은 장애인 무용단이라고 해서 쉬운 걸 배우는 게 절대 아니라고 강조했다. 필로스무용단은 비장애인들이 무용을 배우는 커리큘럼 그대로 ‘한국무용, 현대무용, 발레’ 세 가지를 석사 이상의 최고의 강사진에게 배우는 전문무용가들이다. 매주 수요일 저녁 7시에 수업이 진행되는데 ‘필로스 가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아이들이라서 그런지 두 시간 동안 지친 기색도 없이 즐겁게 임한다.
대학, 국회, 병원으로 ‘찾아가는 공연’ 열어
물론 처음부터 순조로웠던 건 아니다. 장애아동들은 낯선 환경에 쉬이 적응하지 못했다. 음악을 틀어놓으면 우는 경우도 있었다. 아예 연습실에 들어오려고 하지 않아 문 밖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기도 했다. 아이들이 두려워하고 싫어해도 꾸준히 접해주자 점점 변화가 일어났다. 노래만 들으면 울던 아이가 몸을 움직이고 딱딱한 표정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수업시간 동안 열심히 가르쳐서 잘 따라하던 아이가 다음시간에 오면 새까맣게 잊어버리곤 했지만 그래도 다시 처음인 것처럼 차근차근 가르쳤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두 달이 지고 세 번의 계절이 바뀌자 아이들이 달라졌다. 자연스럽게 몸과 맘을 음악에 실었다. 정서적으로 표현이 풍부해지고 신체적으로 유연성이 발달했다. 언어능력과 근력도 발달했다. 기량은 쑥쑥 향상됐고 창작공연을 무대에 올리게 됐다. 안양시관악장애인복지관에서 선녀춤을 선보인 첫 번째 공연 이후 정기공연과 서울대학교 특수체육연구부, 국회, 일산복지타운, 안양샘병원 등에 초청받아 ‘찾아가는 공연’을 펼쳤다. 임인선 단장은 “무대 위의 아이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예뻤고 내 세상인 것처럼 자유로이 활개 치는 모습이 너무도 감동”이었다며 “관객도 주르르 눈물을 흘리고 선생님도, 학부모도 감동의 눈물을 지었다”고 회상했다.
“아이가 활발해지고 교우관계도 좋아졌다”
이날도 수업을 시작한지 한 시간이 지나자 장난치던 아이들도 점점 진지한 표정으로 연습에 몰두했다. 6월 6일 야외공연에 대비해 바닥에는 무대 모양으로 보라색 테이프를 붙여놓고 실제상황처럼 연출했다. 주특기가 ‘부채춤’이라고 소개한 박민선(15세)은 “천 덮는 게 제일 재밌다”며 환하게 웃는다. ‘5학년 4반’ 구자연 양은 “몸으로 예쁜 꽃을 만들 때가 제일 좋다”면서 팔다리를 동글게 말고 고개를 갸웃하며 어느새 온몸을 꽃으로 만든다. 최유정(9세)은 무용단의 막둥이답게 간간히 하품을 터뜨리면서도 큰 실수 없이 자신의 역할을 소화해낸다.
유정이의 엄마 장원선 씨는 “집에서 잠옷 입고 놀다가 잘 시간인데 여기 오는 걸 너무 좋아한다”며 말문을 열었다. “유정이가 소리의 울림 때문에 극장을 못 갔는데 무용시작하고 나서 극장을 가게 됐어요. 또 자신감도 찾았고요. 공연 때 담임선생님이 오셨는데 반 아이들에게 공연이 너무 멋졌다고 얘기를 해주셨대요. 친구들도 유정이를 자랑스러워하고 이해한다니 너무 좋죠.”
창단부터 함께 한 문소연(14세) 엄마 양은미 씨는 인천에서 한 시간 반 거리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지극정성으로 다닌다. “소연이가 무용하면서 무척 밝고 활발해졌어요. 공연하면서 자신감도 찾고 성취감도 느끼고, 또 매주 여기 와서 동생들을 챙겨주고 서로 위하면서 즐겁게 지내니까 힘들어도 안 올수가 없죠.”
이처럼 학부모의 정성과 교수진의 열성, 아이들의 천성이 합을 이룬 최고의 공연이기에 관객들은 아낌없는 탄성을 보내는 것이리라. 6월 6일 오후 1시 마로니에공원 야외무대에서 펼쳐질 ‘새들의 합창’을 기대한다.
<임인선 단장 미니인터뷰>
* 장애아동 무용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 초등2학년에 무용을 시작할 때부터 좋은 무용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정신분열증 환자의 무용효과로 석사를 받고, 서울대장애아동체육센터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지적․발달장애아동에게 무용이 효과적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 장애아동 무용선생님으로서 교육철학은
- 첫째도 둘째도 “기다려주자”는 것이다. 전 시간에 가르쳐준 것을 하나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도 또 가르쳐주면 언젠가 해낸다. 인내와 기다림 끝에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게 교육자의 큰 기쁨이다.
* 단원이 되고픈 장애아동과 부모님에게 한마디
- 무용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예술이다. 장애는 불편할 뿐이다. 망설이지 말고 문을 두드려 달라. 우리 무용단은 전국, 전 세계 장애인에게 전문무용가가 될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드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