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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옆소극장

<파주>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황지우 시집을 한참 들고 다닐 때 <뼈아픈 후회>란 시에 매료됐었다. 첫줄부터 흔든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
내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이 구절이 왠지 멋있었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의 스산함과 사랑한 자의 처연함이 느껴졌다. 모름지기 사랑이란 이 정도의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고 그래야만 ‘값어치 있다’고 믿었다. 몸뚱이의 뼈 206개가 달그락 거리면서 몰락과 생성을 거듭하는 게 사랑이니까.


11월 첫번째 월요일 조조영화로 텅빈 극장에서 <파주>를 보고 저 시구가 떠올랐다. <질투는 나의힘>의 박찬옥 감독 작품 <파주>는 시처럼 리듬감 있고 울림 있게 함축적으로 만든 빼어난 영화다. 남녀가 사랑하면 인생이 허물어지고 다시 조립되듯이 자본이 돈을 사랑해서 낡은 건물이 철거되고 다시 세워지는 공간 ‘파주’가 영화의 배경이다. 주인공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가 되고 마는 한 남자, 이름도 무거운 중식(이선균)이다.

 

  • 보동 2009.11.05 19:43

    제가 사는 동네에서는 <파주>를 상영하지 않네요... 영화를 보지 않아도 은유님의 자상한 해설에 가슴이 짠해져요. 오늘에야 책 발송했어요. 저도 일상에서 하나도 실천하진 못하지만, 아주 아주 가끔씩 마음이 괜히 푸근해지고 넓어지고 싶을 때 읽다보면 도움을 받기도 하거든요.

    • 은-유 2009.11.05 23:30 신고

      나중에 DVD나오면 꼭 보세요. 쓸쓸한 감정이 드는데 칙칙하지 않고 귀하다고 해야하나..의자에 무릎담요 덮고 앉아 낙엽 떨어지는 모습 보는 것 마냥 좋아요. 글고 책은 원래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존재잖아요.이름하여 소장파ㅎㅎ 두고두고 잘 볼게요^^

  • 게으른꿀벌 2010.04.19 23:37

    전쟁아닌 사랑이 어디 사랑인가요. 치열한 사랑이 지나간 자리는 온통 폐허지요. 그래도 사람들은 폐허에서 일어나 다시 살아갑니다. 글도 좋지만 첫 줄 참 맘에 듭니다. 정말 첫 줄부터 흔드네요. 이건 은유서정의 진수아닌가. ->황지우 시집을 한참 들고 다닐 때 <뼈아픈 후회>란 시에 매료됐었다. 첫줄부터 흔든다. 시도 참 좋고.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