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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눈물의 방 / 김정란 '눈물 속으로 들어가봐'

   

   눈물 속으로 들어가 봐
   거기 방이 있어

   작고 작은 방

   그 방에 사는 일은
   조금 춥고
   조금 쓸쓸하고
   그리고 많이 아파

   하지만 그곳에서
   오래 살다 보면
   방바닥에
   벽에
   천장에
   숨겨져 있는
   나지막한 속삭임소리가 들려

   아프니? 많이 아프니?
   나도 아파 하지만
   상처가 얼굴인 걸 모르겠니?
   우리가 서로서로 비추어보는 얼굴
   네가 나의 천사가
   네가 너의 천사가 되게 하는 얼굴

   조금 더 오래 살다보면
   그 방이 무수히 겹쳐져 있다는 걸 알게 돼
   늘 너의 아픔을 향해
   지성으로 흔들리며
   생겨나고 생겨나고 또 생겨나는 방

   눈물 속으로 들어가 봐
   거기 방이 있어

   크고 큰 방


   - 김정란 시집 <용연향>, 나남출판






'내가 어떻게 너를 낳았을까. 태어나줘서 고마워~' 하루에도 몇 번씩, 고장난 벽시계에서 뻐꾸기 튀어나오듯이 수시로 나오는 말이다. 그러면 딸아이는 즉각적으로 화답한다. '괜찮아. 어차피 엄마가 낳았으니까 그렇게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114 안내원처럼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일정한 대사가 나온다. 고 작은 입에서. 그걸 지켜보는 아들은 '둘이 잘한다'며 질투한다. 남편은 '지겹지도 않느냐, 똑같은 말을 몇 년째 하는 거냐'고 퇴박준다. 아무리 설명해도 수컷들은 모른다. 딸아이에 대한 나의 감정은 혈육의 정이라기보다 여성간의 자매애에 가깝다. 할머니 이전부터 대대손손 피를 타고 전해내려온 소수자 감수성이다. 딸아이는 내가 비질을 하면 얼른 어질러진 인형과 종이들을 치워놓는다. 식탁 위에 반나절 묵혀 꼬득꼬득해진 카레밥을 꾸역꾸역 먹고 있으면 '그거 먹고 체한다'고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본다. 다림질을 하려고 다리미를 꺼내면 옷걸이에 걸린 쭈글쭈글한 셔츠를 얼른 대령한다. '엄마는 나같은 도우미가 없었으면 아마 주름이 오십두개쯤 늘었을 거야' 라며 살인멘트까지 곁들인다. 나한테 잘해주니까 푼수처럼 좋다가도, 쓸쓸하다. 고작 8살인데. 아가 때부터 엄마 젖 물고서 한몸되어 눈물의 방을 드나든 아이라 그런가.  

열번 잘하다가도 어느 순간 남처럼 등돌리는 남자들.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와서 씻지도 못하고 이틀째 널려 있는 빨래를 걷는데도 꼼짝 않고 누워있는 남편, 어렸을 땐 아빠를 볼 때면 좀 궁금했다. 옆사람 힘든 게 왜 안 보일까. 나중에 알고 보니 못 본척 하는 게 아니라 안 보이는 거다. 대대손손 소통불능의 장애를 겪는 남성들. 그렇게 살아도 삶이 유지됐으므로 타인의 심정을 헤아리는 능력이 퇴화한 것이다. 무심함이 무뚝뚝함으로 남자다움으로 미화된 데다가, 학교나 학원에서 안 가르쳐주니까 관뚜껑 닫힐 때까지 모른다. 모르고 편하게 살다가 죽는 남자들이 많으니까 그만큼 평생 고생만 하다가 죽는 여자들도 많다. 지하철에서 아주머니들을 보면 마음이 짠하다. 자식키우느라 고장난 육신을 이끌고 빈자리를 향해 빛의 속도로 달려가서 앉는 것도 아줌마들이지만, 의자에 앉아서도 신경줄 놓지 못하고 생면부지의 사람 쿡쿡 찔러서 건너편 빈자리가 났음을 알려주는 것도 아줌마들이다. 오늘도 내 앞에 앉아 계신 아주머니가 나에게 고개짓으로 건너편 빈자리를 가리키셨다. '힘든 사람'이 '선천적'으로 외면이 안 되는 거다. 한 때 딸이었던 사람들은 그렇다. 엄마 따라 눈물의 방에 갇혀보았기에 안다. 나지막한 신음소리. 그곳에서 오래 있으면 들린다. 서로서로의 얼굴을 비춰보는 신통력이 생긴다. 너의 아픔을 향해 열린 36.5도의 눈물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