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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조개의 깊이 / 김광규 "끝내 하지 않은 말도 있었다"


     


     결혼을 한 뒤 그녀는 한 번도 자기의 첫사랑을 고백하지 않았다.
   그녀의 남편도 물론 자기의 비밀을 말해 본적이 없다.
   그렇잖아도 삶은 살아갈수록 커다란 환멸에 지나지 않았다.
   환멸을 짐짓 감추기 위하여 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말을 했지만,
   끝내 하지 않은 말도 있었다.
     환멸은 납가루처럼 몸 속에 쌓이고, 하지 못한 말은
   가슴 속에 암세포로 굳어졌다.


     환멸은 어쩔 수 없어도, 말은 언제나 하고 싶었다.
   누구에겐가 마음속을 모두 털어놓고 싶었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다면, 마음놓고 긴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때로는 다른 사람이 비슷한 말을 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책을 읽다가 그런 구절이 발견되면 반가워서 밑줄을 긋기도 했고,
   말보다 더 분명한 음악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그러나 끝까지 자기의 입은 조개처럼 다물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끝없는 환멸 속에서 살다가 끝끝내 자기의 비밀을 간직한 채
   그들은 죽었다. 그들이 침묵한 만큼 역사는 가려지고 진리는 숨겨진 셈이다.
   그리하여 오늘도 우리는 그들의 삶을 되풀이하면서 그 감춰진 깊이를
   가늠해 보고, 이 세상은 한 번쯤 살아볼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 김광규 시집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