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정류장. 말의 느낌부터 시적이다. 시적이란 건 느낀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 정류장에서 나는 깨어있다. 버스를 기다리느라 나무결 무늬가 들어간 벤취에 앉아있노라면 어디 강둑에라도 앉은 것처럼 관조하는 자세가 된다. 마음의 결이 올올이 살아난다. '나'에 불이 켜지는 느낌이랄까. 코드 빼놓고 살다가 버스정류장 아래 서는 순간 다시 작동한다고 느끼는 이유는, 아마 버스 정류장이 주거공간 바깥으로 나아가는 관문 같은 의미이기에 그럴 것이다. 정류장 아래서면 나는 한마리 새처럼 가볍고 자유로워진다. 가로수의 나뭇잎 떨림 하나 사람들 표정 하나에도 눈길이 가고 하늘도 비로소 깊은 얼굴을 드러내니까. 아스팔트 사이에 난 잡초도 들여다보고, 내 구두의 뒤축이 어슷하게 닳은 것도 알아챈다, 수첩도 꺼내 보고 친구한테 안부 전화도 하고, 혼자 놀기 고수처럼 논다.
고개를 차도로 쭉 빼고 기웃기웃 하는, 기약이 있는 기다림의 행위 자체도 좋다.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버스가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떠나는 뒤통수를 보노라면, 꼭 떠나가는 매정한 그놈같다. 괜찮아. 버스랑 남자는 기다리면 또 온다는 건 진리. 그러면서도 버스가 늦게 오면 약속에 늦을까봐 마음 조이면서 애타게 기다리고, 또 의외로 일찍오면 버스가 흑기사가 몰고오는 멋진 세단처럼 여겨져서 너무 좋다. 1분 1초가 금싸라기처럼 느껴지고, 나의 감정에 민감해지는 시간, 내가 밀도 있게 온전히 나와 주변을 주시하는 공간이다. 어쩌다 지난번 버스에서 내릴 때 카드를 찍지 않아 환승할인 안 되면 막 속상해하고. 평소에도 그렇게 천원을 십만원쯤으로 생각하면 좋으련만. 돈, 시간, 감정이 평소와는 달리 팽팽하게 조여진 긴장상태가 이어지는 시공간. 버스정류장.
버스.가 오면 탄다. 아저씨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한다. 좀 부끄러우니까 잘 안들리는 목소리로. 그래도 꼬박한다. 기다리다 타면타는대로, 바로 와서 타면 또 반가워서 인사드린다. 그리고 운전기사님 라인 말고 앞문 맨 앞자리로 자리를 잡는다. 자리도 제일 편하고 시야도 확보되고 다른 사람이 주위에 잘 서지도 않고, 시선으로부터도 자유롭다. 다들 계단 오르면서 카드 찍느라 눈 마주칠 일 거의 없다. 그렇게 명당자리 차지하고 앉아서 음악 듣거나 멍하게 있거나 책도 보거나 운전기사 아저씨를 흘끔거린다.
기사님들은 반대편에서 같은 번호의 차가 지나가면 아저씨들끼리 자동적으로 손인사를 나누는데, 내내 무표정이던 아저씨가 씩 웃는 그 모습이 그렇게 신기하고 좋을 수가 없다. 아저씨들이 행복해 보여서 그렇다. 어릴 때 엄마랑 버스를 타고 친척집에 갈 때면 기사아저씨들이 너무 불쌍해 보였다. '난 30분만 버스를 타도 이렇게 멀미가 나는데 아저씨들은 하루종일 힘들어서 어떻게 참고 탈까'고민했었다. 지금은 어느 직업이든 밥벌이의 지겨움이 있음을 아니까 괜찮지만. 아무튼 아저씨가 길도 막히고 힘들 텐데 동료를 만나서 '다행이다' 라고, 시내버스운송조합장도 할 리 없는 이상한 생각으로 뿌듯해한다.
마을버스. 내가 사랑하는 마을버스. 작고 느리고 구불구불 돌아가는 미련 곰탱이 같은 마을버스. 그 착하고 가난하고 궁상맞고 푸근한 느낌이 좋다. 효율과 속도의 논리보다 붕어빵처럼 양으로 승부하는 마을버스. 손님도 정류장도 다다익선이다. 마을버스는 종점에서 한참을 기다렸다가 손님을 가급적 잔뜩 태우고 간다. 시간이 빠듯하거나 마음이 다급할 땐 그래서 마을버스를 못탄다. 늦게 출발하니까. 기사아저씨가 아예 자리를 비우고 내려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한 대 피우거나 전화통화를 하신다. 집에서 딸내미가 빨리 오라고 애원하면 그 5분 남짓한 시간이 너무 야속하다. 기다림 끝에 기사님이 운전석에 앉아도 출발시간까지 또 숨을 좀 고른다. 문을 닫고 출발하다가도 뒤늦게 타려는 사람이 앞문을 두드리거나 손 흔들면서 달려오면 또 세워준다. 규정대로 버스를 운행하시는 고지식하거나, 인심이 박한 아저씨는 단호하게 거부표시로 손을 흔들거나 아예 못본척 지나가기도 하신다. 기다리면, 버스는 또 오니까.
마을버스 내부는 천정이 낮아서 키큰 사람은 불편한 구조다. 185넘는 사람들은 구부정하게 서야한다. 울 아들보고도 마을버스 탈 수 있을만큼 인간적인 키, 183까지만 크라고 말하곤 한다. 또 마을버스 타고 다닐만큼 너무 부자가 아니면 좋겠기도 하다. 어느 동네든 마을버스를 타면 그 동네의 구석구석 다양한 사람사는 모습을 보고 느끼니 좋다. 버스에 오르는 할머니들이 무릎에 손 엊고 왼다리 한쪽 올려놓고 '어이구', 또 오른 발 올리고 '나 죽겄다' 하시면 양가 부모님 생각도 난다. 지하철 환승역에선 보자기에 싼 물건을 바리바리 들고 타는 아주머니도 계시고, 그러면 우리 엄마도 저렇게 무거운 거 들고는 돈 아까워 택시도 못타고 알뜰살뜰 살았다는 생각에 쉽게 주저 앉고 편안함에 받친 나의 생활도 반성하고 그런다.
올망졸망 대한민국 평균의 삶과 삶이 어우러지는 공간. 시골장터 같아서 대체로 좋은데 현기증 날 때도 있다. 특히 평일 오후 4시를 전후로 타면 동네 중고딩 애들이 한 학급씩 승차하니까 거의 콩나물의 자격으로 낑겨 간다. 그런데 몸은 힘들어도 또 활력이 넘친다. 중학생 아이들이 귀엽다. 어린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니면서 여드름도 나다 말고 목소리도 변하다만 중닭들이 삐약삐약도 아니고 꼬끼오도 아닌 소리로 떠들면, 비록 욕반 말반이라도 참 예쁘다. 아들 또래라서 더 애정의 눈길이 가는지 모르겠지만. 너네들 크느라 애썼다 말해주고싶다.
오늘처럼 비오는 토요일 밤 11시쯤의 마을버스는 또 이색적인 공간으로 변신한다. 일단 주말 막차시간이 가까워지면 버스가 헐렁하다. 거기다가 라디오 선곡까지 안성맞춤이라면 그 옛날 디제이오빠 있던 다방처럼 운치 만점인 거다. 컴컴한 밤, 작은 동굴같은 그곳에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 있으면 엄마 뱃속처럼 편안하고 나른하다. 아까는 라디오에서 '매일 그대와'를 들었다. 깊은 밤에 새소리, 감미로운 노래가 빗물과 어우러지니 좋더라. 컴컴한 차창에 빗물 맺히는 거 보면서 나도 저기 창에 매달려 내내 가고싶었다. 은하철도999에서 주제가 나올 때 배경처럼 새까만 밤이 가슴으로 밀려왔다. 아, 내리기 싫고나.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 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