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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봄비, 밤에 / 김정환 '떠나도 좋다는 의미일까'


 

  나는 몸이 떨려
  어릴 적, 내 여린 핏줄의 엉덩이를 담아주시던
  어머님 곱게 늙으신 손바닥처럼 포근한 이 비는
  이젠 내 마음 정한 뜻대로 
  떠나도 좋다는 의미일까

  산은 거대한 짐승를 가린 채 누워 있고
  봄비에 젖고 있어 나는 몸이 떨려
  
  그러나 새벽이면 살래살래 앙칼진 개나리를 피워낼
  이 밤, 이 비의 소곤거림은 
  혹시 
  이젠 외쳐야 된다는 말일까
  이젠 외쳐야 된다는 말일까 

  - 김정환 시집 <지울 수 없는 노래>

 


시월의 마지막 밤엔 이용의 잊혀진 계절을 들어야 하고, 봄비 내리는 밤에는 봄비, 밤에를 읽어야한다고 생각했다. 한 삼십년 전쯤 봄, 어느 밤에도 이렇게 비가 다소곳이 내렸나보다. 어여 떠나라, 외쳐라 등 떠미는 건 햇살 담은 봄바람 만이 아니다. 일정한 운율과 같은 가늘기로 내리는 차분한 봄비도 사람의 마음을 묘하게 흔드는 재주가 있다. 아마도 마지막 봄비가 아닐까하는 아쉬움을 달래는데 전화벨이 두 차례 울렸다. 나는 말했다. 한 번은 망설이다가 '네 그럴게요' 한 번은 '앞으로 안 하는 게 좋겠습니다.' 네 그럴게요는, 그닥 내키는 취재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해야했다. 문제는 내가 재미를 느끼는 일이 점점 줄어든다는 점이니까. 니체는 즐거움없이 일하느니 차라리 몰락하라고 했지만, 지방취재도 안 가고 인터뷰도 시간 장소 봐가며 입맛대로 골라하면서 살다가는 굶어죽기 딱 좋으니 고민 끝에 타협을 안할 수도 없다.

원래 힘없는 사람들은 호황 땐 덕도 못보다가 불황 때 가장 먼저 직격탄을 맞는다. 월간지를 격월간으로 계간으로 발행주기를 줄이거나 원고 분량을 줄이는 식으로 사보업계에도 구조조정이 이뤄지고 있다. 그동안 불편부당하게 여겼던 문제점들이 있으나 비정규직도 아닌 일회용 순간직에 가까운 프리랜서들은 발언기회도 없다. 청탁이 오면 일회 고용이고 안 오면 해고인 거니까, 싫으면 절 떠나는 시스템이다. 부당함에 열받아서 떠난 절이 벌써 서너군데다. 이번에 또 한군데와 결별했다. 원고료 지급 날짜가 없고 자금사정을 잣대삼아 주고싶을 때 주는, 그러다보니 두 계절 넘기기 일쑤인 데 심지어 미안해하지도 않는다. 프리랜서 작가들도 생활인인데 근로계약 맺은 게 아니란 이유로 임의대로 처리하다니 나쁜 사람들이다. 우리 인연 끝났다고 말했다. '이젠 마음 정한대로 떠나도좋다'고 꼬시는 빗소리를 응원가 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