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은 내용이 끝내 형식보다 천박하지. 열리고 다시 열리는 새로운 열림을 여는 꽃잎. 깊이도 없이 열림의 열린 중첩이 깊이보다 깊은 그 앞에서는 우주도 애매하고 생애도 허망하고, 그게 영롱한 꽃잎 그리고
영롱은 뼈대가 끝내 응집보다 바삭하지, 열리고 다시 열리는 새로운 열림을 여는 꽃잎, 부피도 없이 열림의 열린 중첩이 부피보다 더 벅찬 그 앞에서는 남녀노소도 부모자식도 구분이 흩어지지만 결합이 영롱하고 흐린 삶이 가까스로 구체적이라 총체적인 꽃잎
울음이 카오스를 응집하고 웃음이 코스모스를 확대하는 꽃잎 아름다움은 필경 그런 새로움의 형식이다 열리는 시간을 영롱하게 하는 꽃잎과 꽃잎 사이 열리는 공간을 영롱하게 하는 꽃잎과 꽃잎 사이 사이와 사이 사이로
- 김정환 시집 <레닌의 노래>
혼자남은 어느 밤 영화가 그립다. '극장가고 '싶어진다. 씨네큐브에 가서 현재상영영화를 고른다. 포스터와 제목을 눈으로 훑는다. 낯선 풍경과 암호같은 단어들이 어지럽다. 배우이름도 영화제목도 고상하다. 힌트가 없다. 그것들 중에 하나가 눈에 크고 선명하게 보이면 본다. <북극의 연인들> 순정만화 제목같아서 왠지 끌린다. 순정만화 제목 같아서 외면할 때가 많지만 이번엔 동일한 그것이 선택의 이유가 된다. 스페인영화란다. 고맙게 비까지 오는 휑한 12월 어느 날 영화를 봤다. 시작부터 인생타령의 나레이션이 나왔지만 빗소리처럼 잔잔히 젖어들었다.
여덟살 어린 아들이 엄마의 이혼소식에 이불 속에서 자는척하며 눈물을 흘린다. 일찍 슬픔과 상실을 알아버린 소년. 제 몸에서 나온 눈물로 다시 온가슴을 적신다. 성장호르몬을 맞기라도한 듯 빨리 커버린다. 눈물 젖은 배게에서 잠들어본 소년, 인생을 논한다. 전날 만난 친구가 떠올랐다. 꼭 3년 만에 아빠의 부재를 설명했다는 친구. 열살된 아들과 공원으로 산책을 가자고 해서 벤취에 나란히 앉아서 얘기했단다. "사실 나 이혼했어" 친구는 연습도 했지만 너무 떨어서인지 저말 한마디밖에 못했다고 했다. 듣고 있던 아들이 눈물을 떨구더라고했다. 그리곤 말하더란다. "차라리 계속 말하지 말지 그랬어." 아이는 덜 어른이 아니다.
소년의 가슴에 깊은 우물이 패였고 그 위로 소녀의 얼굴이 비춘다. 아빠를 잃은 소녀는 소년을 보고 '아빠가 보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재혼한 가정의 남매로 만나는 소년과 소녀. 우연의 과도한 배치. 영혼의 신통한 교감은 성장기 내내 둘의 아기자기한 사랑의 테마파크를 연출한다. "우연이 바닥날 때까지."는 설레고 애틋한 사랑. 운명이라 해도 좋을 그것이 펼쳐진다. 그리고 엇갈리고 헤맨다. 기다리고 그리워한다. 마지막에는 여자주인공이 꽃단장한 채 '오지 않는 그러나 올 것 같은' 그를 '밤새' 기다리다가 만나러 가고, 그러다 차에 치여 죽는다. 죽음으로 영원성이 부여되는 방식까지 애절한 사랑영화다.
'저렇게 죽어서 좋겠다.' 극장문을 나서며 난 중얼거렸다. 사랑하다 죽어버려라. 어느 시인은 시집 제목으로 버젓이 걸어놓지 않았는가. 진정 부러운 사랑이 아니라 진정 부러운 죽음의 영화로 기억된다.
삶의 최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흔히들 생각하듯 요양원에서 코에 호스를 끼운채 영양소를 공급받으면서 연명하는 모습이 있나. 죽은 듯이 누워서 의사와 자식이 임종을 거래하는 소리를 들어야하나. 그래서 신에 의지하고 매달리나. 죽음 후의 구원과 영생을 바라며. 그런데 죽음은 삶의 맨끝에 있지 않다. 죽음은 삶 속에 뒤섞여 있다. 그러니 잘 죽기 위해선 잘 살아야 하는게 맞다. 쉽지 않다. 그녀도 일상을 접고 사랑 찾아 북극의 '백야'를 보러 떠났다. 용기어린 과감한 결단에 따른 축복스런 죽음을 맞았다. 그러니까 이순간이 끝난 후의 구원이 아니라 이 순간의 구원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