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을 말해도 될까요?

[은유칼럼]

“밥 먹으러 올래?” 텃밭에서 딴 호박이랑 가지로 무친 나물, 열무김치, 시레기국까지 너무 끝내주는 반찬이 생겼는데 혼자 먹기엔 양이 많으니 오라고 선배가 호출했다. 말만 들어도 침이 고였으나 시간이 안 맞아서 못 갔다. 다음날 지역 강연을 마치고 상경하는데 해가 떨어지자 제대로 된 밥 생각이 간절했다. 나한테 ‘만족스러운’ 집밥을 차려줄 집-사람은 나뿐이다. 역 근처 식당을 검색했다.

내겐 배고픈 채로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삶의 대원칙’이 있다. 배고프면 남을 미워하고 생을 비관하게 된다. 평상심 회복에 밥만한 게 없다. 메뉴를 이것저것 눌러보다가 검색창을 닫고 선배한테 문자를 넣었다. “반찬 아직 있어?” 택시로 30분. 집밥이 있는 밥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여니 갈색 도기의 정갈한 7첩 반상이 눈에 든다.

선배는 세끼 연속 같은 반찬이라고 했다. 물리겠다고 했더니 고개를 젓는다. “누구랑 같이 먹으면 또 맛이 달라.” 선배는 주말부부인데 이번주엔 배우자가 오지 못했다. 일요일 밤의 스산함과 혼자라는 느낌은 마음을 처지게 하므로 이렇게 얼굴 보고 먹길 잘했다 싶었다. 사람을 외롭게 하는 건 배고프게 하는 것만큼 죄니까.

밥 한끼로 우주적 평온을 경험한 순간, 화두처럼 물음 하나 떠올랐다. ‘나의 불행을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이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될까.’ 지난여름 청소년 비경쟁 토론대회에서 학생들이 만든 질문거리였다. 나는 좀 떨어져 아이들을 지켜봤다. 토론을 위해선 자기 불행을 드러내어 예증해야 하는데 그게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리란 확신이 없으니까 주저하는 것 같았다. 논제의 역설로 인해 두루뭉수리하게 이어지던 토론은 다른 질문을 낳았다. ‘관계 개선에 실패했다면 해결 방안은?’

그날 이후 난 ‘불행과 관계를 일상에서 논증하기’를 소일거리 삼았다. 내가 토론대회에 초대받은 것도 불행의 드러냄 덕분이다. 삭여지지 않는 불행의 기록이 책이 됐고, 책을 매개로 아이들과 만났다. 저자와 독자라는 관계가 발생했다. 일요일 밥 회동은 어땠나. 선배는 적적함을, 나는 허기짐을 드러냈다. 불행보단 불만족에 가까운 상태지만 일상의 자질구레한 불만족이 쌓여 우울감으로 번진다고 생각하면 사소하지 않다. 어쨌든 각자의 결핍으로 서로를 위무했다. 관계가 개선됐다. 며칠 전 모처럼 통화한 친구는 암 진단을 받고 병원을 나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때 나는 생선 굽고 나물 데쳐 저녁밥을 짓고 있었는데, 친구를 집으로 불러 같이 밥을 먹었다. 선배가 차려준 밥심의 기억으로 친구에게 밥상을 내주었다. 개선된 관계를 모방했다.

불행의 스펙트럼은 넓다. 허기, 권태, 불안 같은 일시적 감정부터 가난, 불화, 폭력, 질병, 낙인 같은 구조적 고통까지. 드러냈을 때 사람이 다가오기도 달아나기도 한다. 그럼에도 나는 불행은 말하는 것이 좋다는 입장이다. 내 불행을 나부터 숨기고 부정하면서는 남에게 이해받기도, 상황을 바꾸어내기도 어렵다. 또 터놓아 보아야 불행을 말해도 되는 안전한 관계로 내 주변을 구축할 수 있다.

약한 존재들이 기대어 사는 영화를 만드는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렇게 말했다. “이를 악무는 것이 아니라 금방 다른 사람을 찾아나서는 나약함이 필요하다”고. 찾아나서는 행위 자체가 나약함이 아니라 강인함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배고픔부터 투병생활까지 해결 의지가 있을 때 말도 한다. 살면서 불행 상태가 해소되는 순간은 짧고, 지치고 불행한 채로 사는 시기는 길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행의 해결사가 아니라 불행을 말해도 좋을 관계, 일단 밥이나 먹자고 할 사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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