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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칼럼

"내가 0이 되는 일을 하려고 해요."

내가 떠올리는 낭만은 두 사람이 버스에 나란히 앉아 줄 달린 이어폰을 한쪽씩 끼고 음악을 듣는 장면이다. 혼자지만 연결된 느낌, 좋음의 나눔, 적절한 소란과 고요의 공존, 정처 없는 떠남을 동경했다. 늘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 싶었는데 그것이 혼자는 아니었다. 같이 있을 때 내 존재는 더 활성화됐다. 운 좋게도 직업으로 바람을 이뤘다. 인터뷰하느라 사람을 만났고 그들과 나눈 깊고 오롯한 대화는 매번 나를 예기치 못한 세계로 데려갔고 그 이야기를 잘 쓰고 싶어서 나는 몸이 닳곤 했다.  

2005년도에 자유기고가로 명함을 팠다. 첫 취재가 봉사 경력 30년 된 중년여성의 인터뷰였다. 그 뒤로 블로그에 모아놓은 글의 카테고리 이름이 ‘행복한 인터뷰’다. 누적 147명. 만난 사람은 더 많지만 정말 행복했던 것만 등재했다. 인터뷰집 단행본도 냈다. 마을, 숲, 축제 만들기로 더 나은 공동체를 도모한 이들을 취재한 <도시기획자들>,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 서사를 기록한 <폭력과 존엄 사이>, 책 만드는 젊은 노동자들을 만난 <출판하는 마음>, 현장실습생 르포르타주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까지. 대개는 밥을 위해, 가급적 신념을 좇아 해온 작업이다. 

일간지 인터뷰 연재는 처음이라 두렵지만 설레었다. 첫회는 셀프 인터뷰로 시작한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이 무안한 일을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을 때 담당 에디터가 그랬다. 자기는 월급에 ‘수모 수당’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고. 나의 고료에도 ‘무안 수당’이 포함돼 있다고 여기니까 바로 수긍이 됐다. 무엇보다 인터뷰어는 익숙해져야 한다. 인터뷰 제안을 거절당하는 것도, 상대의 이야기에서 나의 무지를 알아채는 것도 무안을 무릅써야 하는 일이다. 새로운 인터뷰 여정을 떠나며 먼저 인터뷰이의 자리에 앉았다. <한겨레> 토요판을 만드는 신윤동욱 에디터가 질문을 건넸다. 그는 내가 <한겨레>에 4주마다 연재하는 칼럼 ‘삶의 창’ 편집 담당자이기도 했다. 

__________내가 본 것들을 당신도 볼 수 있다면

―제가 (2018년 ‘삶의 창’을 담당하는) 여론팀에 있을 때 작가님의 글이 있는 금요일과 없는 금요일을 구분했어요. 항상 좋은 글을 빨리 보내줘 금요일 마감을 참 편하게, 편하게 했어요. 

“아 정말요? 고맙습니다.”(웃음)

―<한겨레>에 칼럼 쓴 지는 한 3년 반 되었죠. 쓰면서 어떤 이야기를 해야겠다 생각하는 게 있나요?

“생각한 거 있죠…. 왜 갑자기 슬프죠? (한참 말이 없다) 신문이 파급력이 있으니까 지면에 실리기 어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실어다 날라야겠다, 나름 각오를 했어요. ‘나는 전달자다.’ 제가 직업상 인터뷰나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듣는 이야기가 많거든요. 한 개인의 서사에 우리 사회의 모순이 집약돼 있더라고요. 깊게 들여다보면 보이는 사연이 있는데 그런 이야기들이 좀 다 슬펐던 것 같아요.”

―저도 예전에는 좀 민망한 말이지만, 기자로서 제 역할이 한국 사회 운동과 주류 언론사 사이의 컨베이어 벨트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사회 운동의 목소리를 실어 나르는, 통로가 되는 사람이다, 라고. 

“네. 나는 통로다. 예를 들면 학창 시절 왕따 생존자가 성인이 되어 어떻게 사는지 그런 건 뉴스 가치가 크게 없었잖아요. 어떤 사람이 폭력의 희생자가 되고 사회의 편견이나 차별 때문에 고통받는 게 지금은 조금씩 이슈가 되지만 예전엔 아니었거든요. 어떻게든 그런 이야기를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삶의 창’ 칼럼이 짧은 글인데도 그런 분위기가 잘 전달됐어요. 집필을 언제 시작하나요?

“마감 일주일 전쯤 시작해요. 많이 고쳐요. 초고를 써놓고 (출판사) 편집자 친구들한테 보내서 컨펌을 받는데 글의 문제점을 지적받으면 다시 써야 하니까 서둘러 써요.” 

―왜 그런 습관이 생겼을까요? 어떤 사람은 되게 마감에 임박해서 쓰잖아요.

“전 쫓기면 불안해요. 그리고 조심스럽죠. 일간지에 글을 쓰는 것도 어떤 면에서 권력이잖아요.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를 세상에 전달할 길이 없어서 고공농성도 하고 1인시위도 하는 건데요. 제게 주어진 ‘지면 권력’을 허투루 쓸 수 없다는 약간의 강박도 있고요. 저 스스로 글 쓰는 활동가 정체성도 있으니까 공을 들이고 싶었어요.”

―그런 신성함이 있군요.(웃음)

“네. 못 쓰는 것보단 잘 쓰는 게 좋잖아요.”(웃음)

_________글에서 밥이 나오는 기적

북콘서트에 가면 질문을 받곤 한다. 작가님은 어떻게 작가님이 되셨나요? 그러면 나도 천진하게 답한다. 제가 쓴 산문집에 소상히 나옵니다만. 말로 할 수 없어서 글로 썼는데 그걸 다시 말로 푸는 건 곤혹스럽다. 그래도 향후 인터뷰 독자를 위해 추려본다. 이건 무안함을 단련하는 셀프 인터뷰니까. 

은유는 필명이다. 은유 이전에는 한국 여성을 일컫는 보통명사가 된 김지영의 삶을 살았다. 소녀 지영은 여상을 다녔고 고등학교 2학년 때 취업이 결정되고 남은 학창 시절은 독서로 소일했다. 책벌레라기보다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흠모하던 국어 선생님이 추천해주는 ‘사회과학 서적’을 주로 봤다. 1989년 졸업하고 증권회사 지점에서 일하다가 노조 집행부에 들어갔다. 홍보를 담당하며 노조 소식지와 신문을 펴냈다. 글 쓰는 밑천은 그동안의 독서, 그리고 대학 운동권 출신 동료들의 ‘첨삭 지도’였다. 꾸준히 배우고 쓰면서 글쓰기의 쾌락과 효용을 절감했다. 그때 만난 동지와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을 낳고 전업주부로 살다가 집안의 경제 위기를 맞아 재취업을 시도했다. 고졸에 서른다섯 경력단절 여성이 글 쓰는 직업을 얻을 확률은 예나 지금이나 제로에 수렴된다. 자포자기 단계에서 노조 시절 글쓰기 사수였던 선배의 도움으로 사보에 글 쓰는 일을 구했다. 한해 두해 지나면서 국내의 웬만한 대기업 사보 다수에 필자로 이름을 올렸다. 

그렇게 일의 재미와 또 삶의 실의에 빠졌던 즈음,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나는 김선주 전 <한겨레> 기자가 여는 강좌에 참여한 적이 있다. 거기서 그와 인터뷰 짝이 되는 ‘행운 티켓’을 얻었다. (대박!) 당대 최고의 기자이자 닮고 싶은 선배가 나를 인터뷰하고 글로 써준 것이다. 오랜만에 추억의 서랍을 열어보았다. 첫 문장은 이랬다. “마흔살의 김지영은 글 쓰는 여자다.” 그리고 마지막 단락은 이렇게 끝난다. “한곳에 머물지 않는 김지영, 그의 몸은 비록 가정이라는 땅을 디디고 있지만 그의 정신은 계속 세상을 떠돌고 있는, 아마도 그는 진정한 유목민의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10년쯤 뒤 그는 또 어느 곳에 서 있을지.”

―작가님 경력이나 글쓰기 세계를 구축해온 과정이 상당히 독특하다고도 할 수 있어요. 

“그렇죠. 예상하지 못했던 삶으로 흘러온 거 같아요. 글 써서 돈을 벌리라는 것, 글쓰기 수업을 하리라는 것, 책 내는 것도요.” 

―근데 그걸 지난 15년에 걸쳐서 차근차근 이뤄온 거잖아요. 저는 작가님 같은 분이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해요.(웃음)

“이거보다 어떻게 더 성공해요? <한겨레> 신문에 글 쓰면 출세한 거 아닌가요.”(웃음)

―글쓰기 작업을 하면서 생각한 ‘인터뷰는 뭐구나’ 같은 나름의 정의가 있을 듯해요. 

“인생 수업이요. 식상한 표현인데 정말 그랬어요. 글 쓰는 일을 시작할 무렵이 엄마도 돌아가시고 오빠도 병을 얻고 가세도 기울고 애들 둘이 손이 많이 가고 남편과 갈등도 크고 총체적 난국이었는데 인터뷰 다니면서 많이 치유받았어요. 대기업 대표이사부터 촉망받는 신입사원들, 기초생활수급자들, 유명한 예술가들, 온갖 결의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 듣고 글로 쓰다 보니까 정리가 되더라고요. 사는 게 이런 거구나. 사람들은 고통과 불행을 겪으면서도 묵묵히 살아가는구나, 보는 세상이 넓어지니까 내가 가진 고통이 작아졌어요. 덕분에 힘든 시기를 잘 건너왔죠. 또 인터뷰를 하려면 준비가 필요하고. 자료를 찾고 관련 책도 웬만하면 다 읽었어요.” 

―아이고, 성실하기도 했네요. 

“그런가요? 원래 그렇게 해야 되는 줄 알고. 그게 대학에서 관련 학문을 배운 게 아니라 글쓰기에 대한 초기 세팅 없이 시작하다 보니까, 되게 원칙적으로 했던 것 같아요. 어디다가 물어볼 수도 없으니까 서점에 가서 글쓰기 책을 찾아보고 내가 맞게 쓰고 있나 확인하고. 자신감이 바닥나면 훌륭한 작가들이 남긴 말 읽고 심기일전해서 또 쓰고요. 그때 모아놓은 글쓰기 명언들로 <쓰기의 말들>도 펴낸 거예요.” 

___________인생수업 심화반, 글쓰기 강좌

아, 자유기고가! 취재를 가서 명함을 주면 직장인들이 부러워했다. 얽매이지 않는 삶이라나 뭐라나. 그런데 이 자유는 마르크스가 얘기한 ‘굶어 죽을 자유’이고 고용 형태로는 ‘호출형 근로자’다. 한건씩 취재를 의뢰받고 원고를 납품했다. 내 글은 매번 자본의 시험대에 올랐다. 나를 증명할 학벌 자본, 경력, 직함이 없으니 내가 쓴 글들이 곧 명함이고 이력서였다. 원고료는 건당 15만원, 20만원, 가끔씩 30만원. 원고를 보내면 두세달 뒤 통장에 찍혔다. 먹고살려면 꾀를 부릴 수가 없었다. 언어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이 책 저 책 파헤치다가 니체를 만났고, 니체를 제대로 읽으려고 남산에 있는 수유너머에 강좌를 등록했다. 수유너머는 인문학 연구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대학 바깥 공동체로 철학, 고전, 문학 등 대중강좌가 상시 열렸다. 

―인문학에 관심을 본격적으로 가지게 된 계기가 있나요?

“내 고통을 이해하고 싶었던 게 가장 컸던 거 같아요. 왜 나한테 힘든 일이 일어나고 심지어 안 끝나는지 알고 싶었어요. 내 일에 몰두할수록 애들은 방치되는 것 같고, 몸이 힘들고 생활이 빠듯하니까 한숨만 늘고 예민해지고. 이 내면의 괴물을 어떻게 다스리지. 사람이 미운데 어떻게 사랑하고 같이 살지? 그런 문제를 풀고 싶었어요.”

인문학은 위험했다. 철학을 공부할수록 기업 이데올로기에 복무하는 글이 쓰기 싫어졌다. 데이트처럼 두근거리던 인터뷰도 더는 짜릿하지 않았다. 누굴 만나도 비슷한 얘기를 쓰는 느낌. 나는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있었다. 인터뷰의 참된 의미를 훼손하는 것 같아서 인터뷰를 ‘끊었다’. 

1년 정도 휴지기를 갖고 2010년 용산참사 1주기에 맞춰 연구실 동료들이랑 <위클리 수유너머>라는 웹진을 만들었다. ‘전선 인터뷰’라고, 지금 생각하면 참 비장한 제목을 짓고 나는 다시 인터뷰에 나섰다. 지면과 대상의 제약 없이, 원고료도 없이,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서 쓰고 싶은 만큼 썼다. 

주류 언론에서 ‘주목하지 않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방침으로 대상을 섭외했다. 잡년행진 참가자, 트랜스젠더 이주노동자, 홈리스행동 대표, 한국군 ‘위안부’ 연구자…. 격주로 한명씩 100호 넘게 진행했다. 본 적 없는 불온한 삶은 심장을 다시 뛰게 했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자유기고가 일을 완전히 접고 글밥 먹던 노하우를 정리해 글쓰기 강좌를 열었다. 2011년 3월, 첫 수업에 입었던 재킷과 운동화, 뺨에 닿던 서늘한 공기를 지금도 기억한다. 

―은유 작가 글을 보면서 글쓰기 강연을 하면서 참 많은 걸 얻고 있구나 생각했어요.

“맞아요. 내가 가진 정보나 지식을 나누는 자리라고 생각했는데 실제 해보니까 배우는 시간이었어요. 배움은 주입할 수가 없잖아요. 글쓰기 팁을 몇개 안다고 글이 써지지도 않고요. 서로 자기 이야기를 내놓고 같이 모여 있음 자체로 서로가 성장하는 걸 경험했죠. 그걸 ‘배움이 일어난다’고 표현하고 싶어요. 그 연결감 때문에 오래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퍼주기만 하는 게 아니라 받기도 해서.” 

나는 학인들을 통해 다른 세계로 접속했다. 성소수자들, 이혼가정 자녀들, 장애를 겪는 이들, 시민단체 활동가들, 착취당하는 딸들과 더 정확히는 그들이 겪는 고통과 연결됐다. 그러면서 내가 모르는 아픔이 참 많다는 것을, 그걸 내가 무척 알고 싶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만큼 재밌는 일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글쓰기 수업은 내겐 형식을 달리한 인터뷰, 인생수업 심화반이었다. 

_________연결이 많아질수록 성숙해진다

―‘은유의 연결’은 지금까지 해온 인터뷰보다 더 넓은 범위의 다양한 사람을 만나야 하는, 새로운 인터뷰 그라운드잖아요. 인터뷰를 오래해와서 피로감도 있을 텐데, 어떤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지 궁금합니다.

“지나고 보니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보다는 어려운 일을 하는 게 더 낫더라고요. 열심히 하게 돼요. 잘 모르니까 상대의 얘기를 말 배우는 아이처럼 귀담아 듣게 되고요. 제 식으로 표현하면, ‘내가 0이 되는 일’을 하려고 해요. 안 그러면 진부한 글이 나오고 그건 나도 싫고 내가 싫으면 독자도 싫겠죠.” 

―0이 되는 불안은 없나요?

“불안 크죠. 신문 인터뷰는 대상이 광범위해서 카테고리가 없다는 게 부담이죠.” 

―작가님이 전해온 우리 사회의 전해지지 않는, 몫 없는 자들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몫 있는 자들(웃음)을 만나야 할 수 있잖아요. 

“그게 제일 걱정이에요. 주류 인사, 기득권층의 서사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니까 호기심이 별로 안 생겨요. 그러면서 제 안에 어떤 편견이 쌓인 것도 있겠죠. 그 편견을 넘을 필요도 있겠단 생각을 하던 중이었어요. 어쩌면 제로가 아니라 마이너스에서 시작하는 건데 반감을 극복하고 평상심에서 시작하는 인터뷰, 아 정말 어렵겠다.”(웃음) 

―은유의 ‘연결’이라는 말을 선택한 의미가 어떤 건지? 참 좋은 말이지만 좀 오래되고 보편적인 단어일 수 있어서요.

“제가 쓴 책들 리뷰를 검색해보면 ‘사람에 대한 이해가 넓어졌다’는 독자의 반응이 제일 많아요.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는 말이 있는데 강해지는 건 확신할 수 없어도 사람이 성장하는 건 많이 봤어요. 저도 사람들과 연결되면서 좀 나은 인간이 된 거 같고요. 타인에 대해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요. 근데 우리 일상은 파편화되어 있고 보는 사람만 봐요. 페이스북이나 유튜브에서 자기 편향대로 정보를 택하고요. 의견 차이는 피곤하니까 가급적 피하고, 상처받은 기억으로 더 멀어지고. 그런데 어떤 계기로 남의 사는 얘기를 듣게 되면 이해가 생기더란 말이에요. 인터뷰가 나랑 상관없어 보이는 사람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는 물꼬를 터준다면 그 자체로 느슨한 연대의 형식이 될 수 있겠다 싶어요.”

―사람들이 서로의 삶을 살아보긴 힘들어도 알고는 있다, 이거는 좀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그렇죠. 다 살아볼 순 없는데, 누군가의 삶을 아는 게 미처 몰랐던 자기를 발견하는 계기도 되거든요. 제가 쓴 <다가오는 말들> 부제를 ‘나와 당신을 연결하는 이해와 공감의 말들’이라고 했어요. 누군가의 말이 다가왔을 때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면 연결되고 연결이 많아지면서 존재가 단단해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지난봄 유럽 언론들이 1만7천명의 사람들에게 정치성향을 기입하게 한 다음에 대척점에 있는 사람끼리 만나 일대일 대화를 나누게 했더니 오히려 서로 이해가 깊어졌다고 해요. ‘연결’을 통해 하고 싶은 작업도 이와 비슷한 게 아닐지. 

“와, 그러면 너무 좋겠네요.”

―인터뷰 끝나고 필자와 독자가 어떤 걸 느끼게 되면 좋겠다, 이런 게 있다면요?

“그걸 지금 몰라야 이 연재가 좋은 인터뷰가 될 거 같은데요.”(웃음)

셀프 인터뷰를 마치고 바로 다음 인터뷰를 준비했다. 첫 인터뷰이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담당 기자가 연락했는데 성사되지 않았다. 나는 이메일을 띄웠다. 곡진한 마음으로 쓰다 보니 2825자였다. 결국 인터뷰는 불발됐지만 낙담하지 않는다. 만날 사람은 삶이 만나게 한다. 그 신비로운 믿음으로 은유의 연결을 시도한다. 녹취 이유진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19943.html?_fr=mt2#csidxccfa4ea97301f42bb7be5930d028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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