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들의 급소

[은유칼럼]

‘이게 마지막이야’라고 살면서 결심해본 적 있으세요? 연극이 끝난 뒤 관객과의 대화에서 이양구 연출가가 물었다. “담배 끊을 때요.” “회사를 자주 옮겼는데요, 입사할 때마다 이게 마지막이야 결심해요.” 몇명이 답하자 객석에서 와하하 웃음이 터졌다. 나도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프리랜서 시절 원고료 떼이고 사장님한테 독촉 전화 걸 때마다 제발 이게 마지막이었으면 했던, 잊고 살던 좀 우울한 일화다.

연극 <이게 마지막이야>는 무산되는 약속의 연쇄와 그로 인한 일상의 여진을 담았다. 주인공 정화는 편의점에서 일하는 중년 여성이다. 남편이 고공농성에서 승리해 내려왔지만 방 안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회사가 ‘복직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다. 생활에 쪼들리고 급기야 두 아이의 학습지 대금 지불 약속도 지키지 못한다. 딱한 사정을 아는 학습지 교사 선영은 회비를 대납하는 호의를 베푼다. 그런데 연체가 석달이 되어가자 지국장의 압박이 심해지고, 선영은 정화를 찾아간다.

“정말 14만원도 없어요?” 고개를 숙인 정화에게 선영은 목청을 높인다. 정 그렇다면 매일 1만원씩 받으러 오겠다고, 돈이 없어도 지갑에 만원은 있을 거 아니냐고 다그친다. 거기에다 전 알바생 보람도 임금체불내역서를 편의점주에게 전해주기로 한 약속을 안 지켰다며 정화를 원망한다. 가진 자들이 약속을 어길수록 ‘을들의 다툼’은 처절하다. 처지가 비슷한 나머지 그들은 눈앞에 있는 사람의 ‘급소’를 너무도 잘 아는 것이다.

14만원은 두 아이 학습지 3만5천원짜리 4과목 수업료다. 누군가 뮤지션 공연 티켓으로 결제하는 금액이고, 질 좋은 양모 니트 한장 사는 가격이다. 중산층 사교육비의 십분의 일 정도이고, 집필노동자가 원고지 14장 써야 받는 돈이다. 나는 부자가 되고 싶기보다 통장에 14만원이 없는 삶, 만원을 받아내려고 웃으며 인사하던 지인을 모욕하는 사람이 될까봐 겁이 나는데 그것이 개인의 의지나 노력의 문제가 아님을 연극이 잘 보여준다.

등장인물들은 촌각을 다투며 일한다. 난 편의점 점원이 서서 계산만 하는 줄 알았다. 내가 계산만 하고 나오니까. 그런데 물품을 정리하느라 무거운 박스를 들어야 하고 무례한 고객을 응대하고 폐기 도시락까지 챙기는 점주의 눈치도 봐야 한다. 학습지 교사와 배달 노동자는 약속 시간이 지났다는 고객들의 독촉 전화에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고 산다. 어떤 일도 깊게 들여다보면 단순노동이라고 폄하할 수 없다. 식사 시간과 장소도 없는 열악한 일자리가 있을 뿐이고, 그런 자리는 이 사회의 부실한 약속의 안전망으로 인한 피해자들로 채워진다.

이 연극은 ‘파인텍 굴뚝농성’을 모티브로 삼았다. 고공농성이 지상의 일임을 편의점을 무대로 이야기한다. ‘노동존중 사회’라는 촛불 대통령의 약속이 요원한 가운데 고공농성은 진행형이다. 가스안전점검 여성 노동자가 ‘성폭력 없는 안전한 근무를 위해 우리도 형사처럼 2인1조 근무를 보장하라’며 고공에 올랐었다. 톨게이트 수납원 노동자들도 지붕을 점거했었고, 삼성과 싸우는 김용희도 철탑 위로 오른 지 백일이 넘었다.

왜 하필 그 높은 곳인가, 목숨을 건 위태로운 싸움에 나는 눈감고 싶었다. 연극을 보고 나니 아주 조금은 알 것 같다.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지 않기 위해서 올라간다는 게 무슨 뜻인지. 그래서 소심한 약속 하나 걸었다. 부쩍 사망 사고도 잦은데 배달음식이 늦더라도 전화하지 말자고.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열겠다”같이 큰 약속을 어기는 권력자들, 김수영 식으로 말하자면 나라님이나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설렁탕집 주인, 야경꾼에게만 분개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로.

 

*한겨레 삶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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