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9.07.29] 졸음과 눈물
  2. [2019.07.02] 북콘서트 -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3. [2019.07.01] 잠재적 가해자라는 억울함에 관한 문의 (5)

졸음과 눈물

[은유칼럼]

한 중학교에 오전 강연을 갔다가 급식을 먹었다. 점심시간이 12시 반이다. 아이들이 얼마나 배고플까 싶었다. 돌아서면 허기가 올라와 2, 3교시 마치고 도시락을 까먹고도 점심시간엔 매점을 배회하던 그 시절의 내가 생각났다. 아이들에게 배고픔을 참고 강연을 듣느라 힘들었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한 아이가 정말 잘 듣고 싶었는데 잠깐 졸았다고, 죄송하다며 말을 잇는다.

“근데 원래 1, 2교시엔 아침잠이 덜 깨서 졸려요. 3, 4교시엔 배고파서 힘들고요. 5, 6교시엔 점심 먹고 난 뒤라 비몽사몽이고 7교시엔 좀만 있으면 학교 끝난다는 생각에 들떠서 또 집중이 안 돼요.”

너무도 솔직한 고백에 나는 웃음이 빵 터졌다가 이내 짠해졌다. 약간의 과장이 더해졌겠지만 결국 학교에서 ‘살아 있는 시간’은 점심시간뿐인가! 거기다가 생리까지 하면 배도 아프고 책상에 앉아 있는 게 더 힘들다고 옆 아이가 거들었다. 여학생들은 한달에 일주일은 생리 중이다. 생기 잃은 몸으로 장시간 학습 노동에 속박된 학교생활. 그런데도 아이들은 “해주는 밥 먹고 공부만 하는 그때가 제일 속 편한 때인 줄 알라”는 충고를 듣는다.

내 학창 시절엔 아이들이 이렇게 단체로 맹렬히 졸진 않았다. 사교육이 덜해서일 거다. 요즘처럼 집-학교-학원이 정규 코스가 아니었으니까. 그날 대화를 나눈 아이들도 밤 9시까지 학원에 있는다고 했다. 아직 중학생인데 직장인으로 치면 매일 야근인 셈이다. 실제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도 적지 않다. 이러니 책상이 침대로 변할 수밖에. 한창 배움과 활동 에너지가 넘치는 시기에 반수면 상태로 하루하루를 버틴다는 사실은 가까이서 봐도 비극, 멀리서 봐도 비극이다.

교사의 자리에 서 본다. 나는 강연에서 어쩌다가 조는 사람들만 봐도 의기소침해진다. 내 얘기가 재미없나, 지루한가, 잘못됐나 하는 자책감이 든다. 그 쓸쓸한 기분이 감당이 안 돼서 비자발적인 청중이 모인 자리는 가급적 피한다. 그렇기에 더 의아하고 염려스러웠다. 학교에서 일하는 교사들은 아이들이 벼 이삭처럼 일제히 고개 숙이는 그 처연한 졸음의 풍경을 어떻게 날마다 견디는 걸까.

한 고등학교 교사들 책모임에 초대된 적이 있다. 자퇴하는 아이들이 그런단다. 학교에 와봤자 잠만 자고 하는 일도 없어서 그만둔다고. 그런데 그 하는 일 없는 학교의 복판에 자기가 있다고 한 선생님이 웃음 띤 슬픈 눈으로 말했다. 다른 교사는 글을 써왔다. “떠나가거나 무너져버린 친구들. 그 와중에 나는 직업인으로서 교사가 되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되지 못함을 한탄하는 교사인데, 때로는 온종일 엎드려 있는 학생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정지하고 싶다며 속으로 울기도 하는 것이다.”

한페이지 분량의 글을 그가 울먹울먹 읽어내려가는 사이 다른 교사들의 눈자위도 붉어졌다. 교실에서 눈물 흘리는 (학생이 아니라) 교사의 모습은 낯설었는데 묘하게 아름다웠다. 아이들은 알까. 선생님도 이토록 마음이 아프다는 걸, 너희와 잘 해보고 싶은데 방법을 모른다는 걸, 매 순간 무력감에 주저앉는 자신을 일으켜 교탁에 선다는 걸 말이다. 선생님의 눈물이 아이들의 지친 마음에 가닿는 장면을 상상하자 나는 잠깐 마음이 환해졌다.

서로 밀고 밀치며 욕망의 사다리를 기어오르는 일부 교사, 학부모, 학생들이 언론을 장식하고 도드라져 보이는 세상, 그러나 우리 사회 곳곳에는 졸음을 물리치고 눈물을 훔쳐가며 때로 한권의 책에 의지해 말문을 틔우고 고민을 나누며, 그러니까 제 가진 생명력을 총동원하여 매일의 생존을 도모하는 것으로, 답 없는 공교육의 뿌리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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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콘서트 -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글쓰기의 최전선]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북토크 2019년 7월 25일 목요일 오후 7시 30분 팟빵홀에서 바갈라딘, 박태근님의 진행으로 열립니다. 고 김동준 군 어머니 강석경 선생님, 전국특성화고졸업생노동조합 이은아 위원장님과 이야기 나눕니다. 관심 가져주세요.

신청은 요기 
https://blog.aladin.co.kr/m/culture/10947367?Partner=

잠재적 가해자라는 억울함에 관한 문의

[은유칼럼]

아들 둘 키우는 엄마는 고민이다. 스무살인 큰아이가 페미니즘 이슈에 부쩍 민감한 모습을 보이더니만 이렇게 투덜거렸다. “내가 왜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잠재적 가해자 취급을 받아야 해요? 나는 여자들 괴롭힌 적도 없거든요.” 이럴 때 뭐라고 답해야 할지 난감하다 했다. 같은 자리에 있던 이십대 여성이 말했다. 설령 잠재적 가해자로 몰리더라도 자기가 나쁜 짓 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잠재적 피해자는 제 의지와 상관없이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다고.

‘잠재적 가해자의 억울함에 관한 문의’는 여학교 강연에서도 곧잘 나온다. 어떻게 반박해야 하느냐고 걸페미니스트들이 묻는다. 나는 이십대 여성의 언어로 답한다. “남자는 잠재적 가해자라서 억울하지만 여자는 잠재적 피해자이기에 위험하잖아요. 억울하면 바꾸자고 말해봐요.” 다 같이 깔깔깔, 울 일인데 일단 웃는다. 웃음 끝이 쓰다. 아이들에게 한탄 겸 질문을 던졌다. 여성들은 신체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왜 상대의 억울함을 이해시키는 임무까지 맡아야 하는지 우리 생각해보자고.

한 여자 대학생도 고민을 터놓는다. 생애 최초로 커트머리를 했다. 세상 가뿐했다. 샴푸도 절약되고 외출 준비 시간도 단축됐다. 한 남자 선배가 헤어스타일의 변화를 알아보길래, 그냥 호기심에 잘라봤다고 근데 이 편한 걸 그동안 남자들만 했느냐고 심상하게 말했다. 그러자 남자 선배는 누가 언제 머리 못 자르게 했냐고 받아쳤다. 안부에서 출발한 대화가 서먹해졌다. 그 일이 맘에 걸린다며, 여자 대학생은 남자들과 불편하지 않게 대화하는 법을 물었다.

글 잘 쓰는 법처럼 답 없는 질문이다. “머리 길이가 세상을 활보하는 여성의 경험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는 것”을 남자에게 10분 안에 이해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인격체 이전에 관상용으로 취급받는 건 여성 공통의 사회적 경험이다. 그리고 대화에 불편함은 기본값이다. 생각의 결을 맞추는 일은 통증을 수반한다. 그보다 나의 궁금증은 이것이다. 남자 선배도 이 일로 뒤척였을까. 주변 사람에게 여자 후배가 ‘페미니즘을 공부하더니’ 예민해져서 말하기가 조심스러운데 대화하는 방법을 찾고 싶다며 조언을 구했을까. 그랬을 수 있다. 그런데 적어도 내 주변엔 이런 일상의 말 한마디나 에피소드 하나를 두고 그 상황을 복기하고, 반성하고, 모색하는 남성의 목소리는 드물다.

목마른 자가 샘 파는 이치 같다. 여자로 사는 일은 상대를 이해시키는 일이다. 밤에 다니는 것도, 혼자 여행을 가는 것도, 어떤 직업을 택하는 것도, 결혼부터 화장까지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한글부터 페미니즘까지 공부하는 이유도…. 이 세상 ‘아버지들’에게 설명의 통행료를 지급해야 한다. 그래야 삶의 통로가 겨우 확보됐다.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공감력이란 게 있다면 이 자기 증명의 훈련 덕분일 것이다.

인류를 둘로 나눠본다. 살면서 사사건건 자기 사정을 남에게 설명해야 했던 사람, 굳이 남에게 자신을 설명하지 않아도 사는 데 지장이 없었던 사람. 페미니스트에 반감을 가진 아들을 둔 엄마도, 걸페미니스트도, 어긋난 대화로 고민하는 커트머리 학생도 태어나서부터 전자의 삶을 산 경우일 거다. 남(자)의 기분을 헤아려 조심스럽게 말하고 이해시키는 건 여자의 임무라고 배웠으니까.

나도 그랬다. 노동을 소통으로 알고 살았다. 설명되지 않은 것을 설명하는 혹독한 지적 정서적 감정적 노동을 한쪽에서 너무 오래 전담했다. 이 관계의 불균형이 공감 능력의 양극화를 낳고 있다. 사실 잠재적 가해자의 억울함은 잠재적 피해자의 고통을 알면 사라지는 감정이다. 제 몸 돌려 타인의 입장으로 건너가보는 일은 지구를 반대로 돌리는 일처럼 불가능한 게 아니다.

 

*한겨레 삶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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