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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칼럼

위로공단 - 그가 누웠던 자리



영화 <위로공단>(감독 임흥순·제작 반달)을 보았다. 일하는 여성노동자 22명의 깊은 목소리를 담은 다큐멘터리다. 얼굴선이 너그러운 중년 여성이 인상적이었다. 카메라 앞에서 지난시절을 회고하는 그녀는 1970년대 구로공단 노동자다. 푸른색 작업복을 입고 풀밭에서 도시락을 먹는 동네 언니가 멋져 보였고 일에 대한 기대감을 안고 대기업 공장에 취업한다. 실상은 달랐다. 매일 철야작업이 이어져 타이밍 같은 각성제를 먹어야 했다. 관리자의 욕설과 성희롱을 견뎌야 했다.


이 장면에서 나는 후배의 말이 떠올랐다. 취업준비생 시절, 도심의 빌딩숲을 지날 때 직장인들이 몹시 부러웠단다. 하얀 셔츠 위에 출입증을 메달처럼 목에 걸고 손에는 아메리카노를 들고 삼삼오오 웃고 떠드는 그들을 동경하며 직장생활을 꿈꿨다고. 그런데 막상 건물에 입성하니 ‘웃음의 실상’이 파악되더란다. 종일 격무와 회의에 시달린 탓에 ‘점심시간’에만 겨우 얼굴이 피어날 수 있는 거였다며 “속았다”고 통탄했다.  


예전에도 속고 지금도 속는 노동자. 겉 다르고 속 다른 일터. 영혼을 탈탈 털어가는 자본. 영화 <위로공단>은 이 구조적 반복과 고통의 질적 변화를 찬찬히 보여준다. 구로공단 ‘공순이’부터 다산콜센터 ‘콜순이’, 탈의실 바닥에 상자 깔고 밥 먹는 마트노동자, 감정노동에 미적노동을 강요당하는 항공사 승무원까지. 내 친구이자 동생이고 엄마인 이들의 목소리는, 슬프게도 영화 속 한 여성의 증언으로 귀결된다. “회사는 우리의 모든 걸 소모시키길 원한다.”


이것은 노동자의 자기표현이 자기각성으로 이어지는 빛나는 대목이다. 아동문학가 이오덕 선생도 일 하는 사람들이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고 말했다. 맞다. 그런데 세계 최장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나라의 노동자가 글을 쓰기는 어렵다. 글쓰기가 업인 나도 1년 남짓 직장에 다닐 땐 퇴근 후 한 줄도 쓰지 못했다. 충전기에 꽂힌 핸드폰과 나란히 누워 ‘노동재생산의 밤’을 보내곤 했다. 업종 불문 비슷한 처지다. 그렇다면 어떻게 ‘노동자의 말’을 틔워낼까. 


<위로공단> 엔딩 자막이 힌트가 될지도 모르겠다. ‘40년간 봉제공장에서 일한 어머니, 백화점 의류매장과 냉동식품 코너 판매원으로 일한 여동생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는 내용의 헌사가 올라간다. 이 영화는 일하는 엄마의 아들이자 일하는 누이의 오빠의 기록인 것이다. 


내가 진행하는 글쓰기 수업에서도 비슷한 작업을 한다. 엄마 이야기 듣고 쓰기. 가장 천대받는 직업인 똥 치우는 아줌마 간병인, 김밥집에서 종일 김밥만 말다가 손목이 고장나 재래시장에서 거스름돈만 겨우 내어주는 일을 하는 빵집 종업원, 솜먼지에 목이 막히고 재봉틀 소리에 귀가 멀어가는 이불집 미싱사, 목욕탕 매점 이모…. 일하는 사람들의 진짜 이야기는 <위로공단>에서처럼, 노동자 엄마의 존엄을 살리고 노동자 자식들을 삶에 눈뜨게 했다. 자기 삶을 풀어놓은 엄마들은 하나같이 자식들에게 이런 말을 전했다고 한다. 내 이야기 들어주어 고맙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윤동주 시 ‘병원’ 부분


한 사람의 노동자가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고 한 사람이 다른 노동자의 삶을 기록한다는 것. 그것은 떠들썩한 이해나 분석이 아닌 그저 그가 누웠던 자리에 가만히 누워보는 일인지 모른다. 남의 삶의 자리에 내 몸을 들여놓는 일, 이 조용한 기울임과 존재의 포개짐이 얼마나 뭉근한 위로인지, 영화 <위로공단>은 말하고 있다. 



* 한국방송통신대학보에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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