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내리기 하루 전날. 수능 한파가 몰아친 날. 그러니까 겨울 초입에 서촌을 찾았다.
체부동에서 통인동 지나 옥인동으로. 예전 내 근무지. 점심 먹고 옷깃 동여맨 채 종종걸음으로 산책하던 그 길.
길담서원이 이사를 한 뒤로 한 번도 가보지 못하다가 이날에서야 발을 디딘다.
숨은 그림 찾기처럼 찾고 나면 잘 보이지만 모르면 꼭꼭 숨어 있는 집. 등 뒤에서 나를 놀래킨 서점.
박성준 대표님 만나러 귤 한상자 들고 동료랑 동행했다.
이런저런 책관련 포럼의 자문을 구하기 위한 자리. 박대표님이 외부 일정 마치고 들어오는 길이라고 했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지만 가끔 늦기도 하는 것은 좋은 거 같다. 숨 고르기의 시간.
이런 틈. 일상의 여백. 서가를 기웃거리면서 침을 꼴딱 삼켰다. 사고싶은 책이 너무 많아서.
그 때 문을 열고 누가 들어온다. "언니!" 미경언니다. 그러고 보니 '류가헌'은 여기서 가깝다. 가끔 종종 들른다고 했다.
언니는 김경주 시집을 찾고 있었다. 서가에 같이 머리를 들이밀고 코를 킁킁 책을 찾다가 여기 없네 어쩌네 하는데
시집 한 권을 뽑아들더니 물었다. "이거 있어? 좋아. 돌아가시기 전에 나온 마지막 시집인데..."
그 시집이 나에게 없다니 언니는 그럼 선물하겠다고 했다. "진짜?" 내 눈은 토끼처럼 커졌을 거다.
난 세상에서 시집 선물 받는 게 제일루 좋다. 이렇게 예기치 않게 받는 건 더욱. 아웅. 좋아라. 했더니
"살면서 이런 즐거움도 있어야지." 했다. 난 시집에 흔적을 남겨달라고 했다. 두고두고 보려고.
햇살 아래서 펜으로 무언가를 써내려가는 언니는
박대표님이 들어서시고 내가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감쪽같이 사라졌다.
서촌에서의 돌연하고 신비로운 만남. 선물. 꿈 같은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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