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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1차시 리뷰_ 일상적인 것이 시적인 것이다

천연나방 – 조금 더 정확한 표현으로 

 

애당초 모호한 남의 기억을 갖고 일하는 직업적 경험을 기반으로 글을 써서 그런지 문장이 조심스러워요. ~같다. ~문제다. 중복이 많고 예컨대, 기실은, 어쩌면, 그러니까 등 부사 사용이 빈번합니다. 자신 없는 말투, 지나친 부사사용은 모두 메시지 수용을 방해하는 것들입니다. 문장에 군더더기가 많을 경우 글을 다 읽고 나도 선명하게 남는 게 없습니다. 나중에 책을 쓰신다하니, 더욱 주의하셔요.

 

 

-‘무슨 일이 있었다(.)’와 ‘어떻게 기억 한다’는 전혀 별개의 말 같다.(->말이다.)

-만약 진실이라는 것과 연관 짓는다면 전자가 객관적인 사실에 관련된 것이라면 후자는 ‘주관적 진실’에 가깝다.

->만약 진실이라는 것과 연관 짓는다면, 전자가 객관적 사실이고 후자는 주관적 진실에 가깝다.

 

-전자는 예컨대 과거의 당시를 촬영한 영상에 가장 근접한 것일수록 진리에 가깝다고 여겨지겠지만 후자는 다르다.(후자는) 지금 현재 그 당시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그래서 (기실은) 기억은 과거가 아닌 here and now(의 문제이)다. (->문제이다, 중복 삭제)

-그 때는 또 시세미나로 내 외로움을 그럭저럭 달래고 있었던 것 같다.

내 직, 간접 경험만큼 동료들의 말들을 이해했던 것 같다. 수줍었던 것 같고 뭔가에 겨워 있었던 것 같았으며 속으로 우쭐했었던 것 같지만 항상 소통의 부재에 갑갑해 했었던 것 같다.

 

 

두 번째 단락은 문장이 사건 없이 관념적 설명으로 이뤄져 있네요. ~모르겠다는 표현이 빈번하니 더 혼돈스럽고 모호해요. 이럴 경우 배경지식이 없는 독자는 글을 따라가기가 어렵고 필자의 독백에 가깝습니다. 소통을 위한 글을 써주세요.

 

 

-그와 헤어지는 순간 감당할 수 없는 억압되었던 ‘나’가 밀려와 나를 채웠고 채워진 내 곁에는 산과 같은 아쉬움이 함께 했다...나는 자주 이와 비슷한 모순된 마음을 접한다. 아마 그들은 ‘마음을 쉬고 싶은’ 바램에서 편히 모순되어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마당은 ‘주인의 마음이 숨어 있지 않은 것처럼 안온하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제는 주인 마음도 함께 혼돈이다. 그들이 모순일 때 나는 길을 잃고 헤맨다.

 

 

아래 문장은 살아있는 경험에서 나오는 섬세한 표현들이 좋습니다. 나의 일에 관해서 말할 때는 설명하면 복잡하니까 하나의 사례를 들어서 말하는 경우가 더 낫겠죠. 기억은 과거가 아닌 현재를 드러낸다. 이런 식으로 명제화시켜서 이야기를 끌고 가도 좋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일이 엉클어진 실 뭉치 같은 마음을 풀어가는 작업인지 응어리진 마음을 녹여가는 협업인지 혹은 혼탁한 액체의 불순물이 가라앉기를 가만히 기다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력자 역할인지 여전히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아니 그 어떤 것을 해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조차 부담일 때가 많다. 그러니까 사실 나는 ...... 나는 그냥 아직은 최대한 열심히 듣고 대화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김민지 – 불만의 시적 표현을 위하여

 

 

김수영의 시구와 자기의 생각을 찬찬히 써내려갔네요. 마주보며 솔직하고 담담하게 잘 써내려갔습니다. 주위의 시선, 현실의 안락, 익숙한 갈등. 하지만 빠져나올 수 없는 직장생활의 늪. 그 안에서 방황이 공감이 갑니다. 자기진술적인 내용에 구체적인 에피소드가 들어가면 더 글이 생생하겠죠. ‘씀씀이가 커졌다’ ‘멍청한 소비를 하며 살고 있다’고 하는데 어디에 주로 지출을 하는지 ‘문득 문득 “내가 뭐하고 있지?” 라는 회의감이 든다’는 감정은 주로 언제 느끼는지. 카드명세서 봤을 때인지, 내가 느끼는 나의 초라함은 구체적으로 어떤 요소인지, ‘몸을 사리지 말고’ 더 풀어서 써주면 참 좋은 글이 될 것입니다. 타당한 불만을 방향성 있는 불만으로 표현해야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 불만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나를 포함한 보통의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를 마주 보지 못하고 숨기려 한다. 나의 있는 그대로를 마주 보면 초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김수영 에게 나를 바로 보는 방법을 배워 본다.

 

 

-힘이 들어 정신을 못 차릴 땐 김수영처럼 술도 먹어보자. 뭐든 직접 몸으로 느껴봐야 방향을 찾을 수 있다. 몸을 사리지 말고 기쁨과 슬픔, 삶의 고달픔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바라보자. 방향성 없는 불만이 아닌 김수영처럼 타당한 이유로 불만을 표현하자. 자유롭게 세상을 바라보고 겁 없이 살다 보면 진짜 나를 보는 눈이 생길 것이라 믿는다.

 

 

 

맑음 – 사건 이후가 더 중요하다

 

 

사건은 매개일 뿐이에요. 글의 비중에서 사건에 대한 서술이 좀 많네요. 이런 사건일수록 나는 흥분하고 남은 지루하기 십상입니다. 원래 나와 남의 감정의 온도를 맞추기가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고요. 그것을 최대한 가능하게 하려는 시도는 해야겠죠. 누구나 살면서 가끔 비상식적 행태를 직면하게 되죠. 그것을 글감으로 채택할 경우, 상황 묘사는 간략하게 최소한의 정보를 전달하고요. 그 사건에 대한 자기 자신의 반응과 감정에 집중해야 합니다.

 

 

비장해지는 나. ‘오랜만의 잠금해제’가 되었다고 했는데 당시 상황의 어떤 특수성이 있었는지, 이전에는 몰상식한 사람에게는 어떻게 대했는지, ‘내가 이런 사소한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하고서 어떻게 세상의 불의에 대해 말할 수 있나’ 라고 할 때 사소한 문제와 대비되는 세상의 불의는 뭐라고 여기는지. 이번 사건 이전과 이후, 사소함과 거대함 등 선명한 대비가 되면 글이 설득력을 갖습니다. 맑음님이 민원을 넣고 해결되는 과정은 통쾌하고 이런 해결방법을 공유하는 것은 글의 공익적 가치를 높입니다.

 

 

발끈하는 나, 갸륵한 나, 혼란스러워하는 나. 모두 내 안의 나죠. 그중의 진짜 나가 누구냐를 찾는 게 아니라, 내가 기르는 무수한 자아를 마주치고 알아가는 일이 글쓰기 작업이 아닐까요. 마지막에 양말짝, 비유 좋아요.

 

 

- 토닥여 주듯 -> 토닥여주듯 (붙여씀)

- 야지랑 대다 -> 일본말로 나오네요. 적당한 한국어로 대체해야죠. 깐죽거리다?

- 바락대고 싸웠던 것도 나이고 갸륵한 얼굴로 사고를 넘기던 순간에도 나는 나였어. 하지만 ‘강자 앞에 당당한 나’는 정말 나였던 걸까? 내 안의 간극을 이해할 언어를 찾지 못한 채 만들어낸 ‘나’들은 지금 어디를 떠도는 걸까. 나는 그냥 나쁜 년인 건지, 그래도 그리 나쁜 년은 아닌 건지, 그러니까 말이지, 내가 나를 속이는 건 양말짝을 맞추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어.

 

 

 

초롱 – 한 가지 주제를 끈질기게

 

일만시간 법칙으로 시작한 도입부 좋습니다. 이어 ‘수학과를 졸업하고 수학 가르치는 일을 20년 넘게 해 왔’다고 했는데 그게 시간으로 환산하면 몇 시간인지 써주시면 더 실감나겠죠. 일만시간 법칙은 왜 누구에게 적용되고 누구는 피해가는지, ‘선천적인 재능이 없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대가가 되기는 힘들다’는 신문기사 인용을 예로 들고 다른 책도 찾아보면서 그 부분을 끌고나가도 좋은 글감이 되었을 텐데요. 갑자기 주제가 글쓰기로, 심리학 공부로 연결되니까 글 흐름이 툭툭 끊기네요.

 

 

‘날카로운 지성도, 지혜도 가지지 못한 내가 한심할 뿐이다. 글쓰기를 할 신체적, 환경적 여건이 아닌데도 바라고만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다.’

 

 

이런 부분은 쉬운 푸념입니다. 이것이 글이 되려면 근거와 사례를 제시해야죠. 나는 수학교사로서 논리적인데 감수성이 부족하다. 그런 걸 언제 느낀다거나 하는 생생하고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야합니다. 또 글쓰기 적합한 신체적 환경적 여건은 뭐라고 생각하는지도요. 글쓰기는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자기인식이 되고나면 덜 서럽지 않을까요. 초롱선생님의 글 오랜만에 반가웠습니다.

 

 

 

 

임효진 – 죽은활자의 정체를 밝혀라

 

 

글은 어차피 자기 생각을 담아내는 작업인데요, ‘~생각한다’는 동사는 피하는 게 좋습니다. 첫 단락에 연달아 나오네요. 그럴 때 글이 축축 쳐집니다.

 

 

‘요즘은 대학을 뭐 하러 그렇게 기를 쓰고 다니려고 했을까 생각한다.’

-> 왜 그렇게 대학을 기를 쓰고 다녔을까.

 

 

대학에서 사람도 사랑도 관계도 배웠다고 나와서 앞 내용과 충돌해요. 괜히 다녔다고 하기엔 너무 큰 걸 얻으셔서 설득력이 떨어지죠. 졸업을 앞두고 시대가 요구하는 인재가 되어야한다는 불안감, 흔들림. ‘나를 지우고’ 현실에 타협하는 과정, 갈등이 드러나죠. 그러다가 다시 ‘가끔 대학에서 배운 내용을 떠올려보면 한심하다’로 논의가 전개되고 마지막은 책이 감옥이라는 마무리로 끝납니다. 글이 우왕좌왕합니다. 죽은 활자로 사람을 살리는 공부가 가능할 리 없다는 문제설정은 그 자체로는 좋은 글감이 될 텐데요. 그것이 하나로 수렴하려면 대학‘생활’과 대학‘공부’를 구분해야합니다. 대학생활 전체 비난, 독서 전체의 무용론은 글이 커져버려서 설득력 잃게 돼요. 글감의 대상을 좁히고 구체화시킨다면 더 좋은 글 쓸 거예요.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의미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다른 일을 했어도 의미가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 이런 표현은 모호하고 위험해요. ‘다른 일’이 너무 종류가 많고 자칫 폄하하는 느낌을 줍니다. 마치 시골 가서 농사나 지을 걸 그랬다, 는 말처럼 농사의 어려움과 위대함을 모르듯 세상물정 모르는 이의 말 같이 들릴 수 있거든요.

-돌이켜보면 여전히 책은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주기도 하지만 또 내 안에 갇히게 만드는 감옥이다. 겨울왕국 엘사처럼 나만의 성을 만들어 그 안에 들어앉아 위선의 평안을 찾는다. 죽은 활자에서 사람을 살리는 생각이 나올 리 없다.

 

 

 

나비 – 현실을 기록하는 카메라처럼

 

 

아직 감을 못 잡았다고 하셨는데 처음이라 어려우셨을 거예요. 시와 조응하여 쓰느라 더 헷갈리셨을 텐데요. 일단 글을 처음 배우는 사람은 절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을 피해야합니다. 뮤직비디오 말고 다큐멘터리를 찍는다고 할까요. ‘나는 욕망할 수 있기에 소유할 수는 없어도 너의 가지를 분지를 수는 있다. 너를 파멸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같은 경우 언제 그런 충동이 들었는지 장면을 보여주시면 공감하겠지요. 소유와 파멸은 흥미로운 개념이거든요. 시적인 잠언처럼 던져진 말들이 멋지긴 한데 이런 모호한 말은 한두페이지 쓰고나면 더 이상 글이 진전이 되지 않습니다. 일상이라는 무궁한 세계에서 하나씩 글감을 잡아채서 써주세요. 마당을 서성였던 김수영처럼, 바로 앞에 있는 것부터요.

 

 

- 나를 꽃으로 비유하지 말라. 설움에 목 놓아 밤새 울어재껴도 나는 욕망 할 것이다. 난 소유할 것이다. 그리고 시를 쓸 것이다. 아는 것과 욕망 사이의 간극에 「풍뎅이를 집어넣어 그 등판」에서 계속 미끄러져 내릴 것이다.

 

 

- 소유에 집착하지 말라니 그것이 그리 쉽단 말이냐, 넌 지쳐 쓰러질 것이다. 혼자 도는 것들은 다 그러하다. 난 맞물려 세상을 살아가기에 소유욕이 지배되고 채찍이 가해지길 바라는 것이다.

 

 

 

강준혁 – 한 문장에는 한 가지 사실만

 

 

감수성이 섬세하고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에 분명 유리한 지점이 있지만 자기몰입적이어서 자폐적인 글을 생산할 확률도 그만큼 높습니다. 그리고 착하고 반듯한 사람보다 좀 삐딱하고 못된 사람이 글쓰기가 처음엔 낫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안의 도덕기제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죠. 준혁샘은 찬찬하게 글을 풀어가는 능력이 있는데 착한 결론으로 수렴하는 글이 되어서 밋밋해졌어요. ‘설움의 자리를 내어주자’라는 말은 굉장히 모호하거든요.

삶에서 설움의 경험들을 무수히 마주한다. 유년시절처럼 생생하게 대학생 때 군대에서 직장에서처럼 단계별 혹은 시기별로 설움의 사건을 보여주는 거죠. 그리고 살면서 설움을 피해갈 수 없었으니 걍 자리를 내어줄란다 했으면 깔끔했겠죠.

 

 

일문일사. 한 가지 문장에 한 가지 사실만 담아주세요. 문장이 명료하면 메시지 전달이 잘 된답니다.

 

 

-살면서 이런 저런 바람의 좌절과 그로인한 설움이 쌓여가면서 어느 순간부터 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란 말을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내 주변사람에게도 곧잘 하곤 했다.

->살면서 좌절과 설움의 쌓였다. 어느 순간 난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아, 라는 말을 나에게도 나에게도 곧잘 했다.

- 사람들의 이야길 들어주는 것을 좋아하고 그것에 잘 공감하지만 정작 내가 뭘 기대하고 바라는지 나의 이야길 하는 것을 꺼려한다.

->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좋아하고 공감한다. 그런데 정작 나의 이야기는 꺼린다.

 

 

-보편적 감정을 떠나 특정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이라는 것은 결국 나의 선호요, 취향이요, 표현인데 그런 감정을 부정하면 과연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내가 존재할 것인가. 바람과 감정이 있기에 결국 나란 사람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던가.

 

 

 

 

설리 – 왜 무엇이 나를 여기에 데려다놓았을까

 

할머니 얘기, 영화얘기. 이제 어떤 상황을 전달하는 것은 꽤나 능숙하고 자유로워졌어요. 4기에 설리글이 건조했는데 지금은 글에 온기가 돌고 그것이 가장 큰 변화이자 성장으로 보이네요. 그런데 문제의식이 없는 글이라는 비판이 나왔고요. 문제의식을 일부러 뺀 건 아니고 뭘 말하고 싶은지 나도 모르겠다고, 수업이 끝나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그렇죠. 문제의식이 그렇게 뚝딱 생겨나면 글쓰기의 고통도 없을 터. 생각을 묵히다가 낳는 출산의 과정을 거쳐야겠죠.

 

왜 어떤 사람들은 영화를 (보는 걸 넘어서) 만들고 싶어 할까. 설리의 욕망에 집중해보세요. ‘뭐 같은 일’이라는 배우의 일갈대로, 큰 고생을 감내할 만큼, 할머니 발인이 끝나기 무섭게 뛰어갈 만큼 나는 왜 영화판을 기웃거리는지, 미술팀 일이 좋은지. 소위 성공한 감독, 배우는 자기 직업을 많이 이야기하지만 주변부적인 직업은 그럴 기회가 없잖아요. 그걸 편히 솔직하게 풀어서 보충하면 이 글은 참 훌륭해요.

-단편영화를 촬영하고 여러 번의 영화사 시험을 보고, 현장의 사람들을 만났다. 감독, PD, 작가 등 그들이 영화를 하면서 느꼈던 것, 배웠던 것, 나누고 싶었던 것을 들었다. 다들 입을 모아 하는 첫 마디는 영화일 힘들다는 말이었다. 힘든 만큼 보람이 있다고 느낀다면 보람 있는 일일 수도 있다는 덧붙임이 간혹 나왔다.

-> 설리만의 느꼈던 것, 배웠던 것, 나누고 싶었던 것, 그리고 보람은 무엇인지.  

 

-배급사나 투자사에서 오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가지각색의 관점으로 영화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영화를 전공하지 않았던 우리 모두에게 유익한 시간이었다. 정답은 없지만 각자의 답이 있었다.

-> 어떤 유익함인지, 설리의 답은 무엇이라고 현재 생각하는지.

 

-가끔 희열을 느끼고 간혹 무료함을 느꼈다. 원하는 그림은 뚜렷하게 없지만 원하지 않는 그림은 명확히 갖고 있기에 어려웠다. “너네 왜 이렇게 좆 같은 일로 먹고 사냐!” 다들 웃었다.

 

 

 

박선미 – 등장인물이 많으면 혼란스럽다

 

 

못생긴 설움의 성장기. 에피소드가 비슷한 류가 중복되네요. 좀 길다는 느낌입니다. 친구 여동생에 대한 남자들의 로망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 오랜 눈물겨운 위문편지 군비라지 등 두어 가지로 압축하면 좋겠어요. 외모에 대한 집안과 집밖의 상반된 평가도 좋은 글감이죠. 어떤 분은 그래서 “사람 팔자 시간문제가 아니라 장소문제”라고 말하던데, 나에 대한 평가가 왜 달랐을까. 고민해보면 재밌겠죠. 외모에 대한 평가와 성격 형성에 대한 부분도 탐구해보고요. 이 글은 등장인물과 사건이 많은 것에 비해 주제의식이 모호합니다. 나는 삼남일녀의 셋째다. 두 오빠와 남동생은 훤칠하다. 나는 작고 못생겼다(고 구박받았다) 뭐 이런 식으로 가지런히 정돈하면서 이야기를 풀어 가면 좋았겠죠.

 

 

-오빠들의 비주얼 -> 오빠들의 외모

-다리 밑에서 주워온 못생긴 나의 설움의 주범은 늘 오빠들이다.(비문)

-> 나는 다리 밑에서 주워온 못생긴 딸이라는 설움을 받았다. 그 주범은 늘 오빠들이다.

 

 

-남자들이라면 대부분 어쩌면 지구에 살다 간 모든 남자들이 그러했을지 모르겠다. 친구의 예쁜 여동생과 로맨스를 꿈꾸지 않았을까 싶다. 더구나 친구의 외모가 키가 훤칠한 훈남의 경우라면 여동생에 대한 기대치는 그야말로 극에 달한다. 게다가 두 살 혹은 네 살이 어린 여동생이라면 장래를 꿈꾸기도 하겠다. 친구중의 하나는 친구여동생 보다는 이상하게 친구누나한테 더 끌린다고도 하는데 다행히 남동생은 나보다 여섯 살이 어려서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됐다.

-> 일반 남자들. 친구 여동생. 친구의 외모. 훈남. 두 살 네 살 어린 여동생. 친구 중의 하나. 친구여동생. 친구 누나. 남동생. 등등 한단락에 등장인물이 과하고 정보가 쏟아져서 혼란스럽죠.

 

 

-두 오빠들이 자신들의 세상을 찾아 떠나가면서 못생긴 나의 일상에도 서광이 비추기 시작했다. 못생긴 내게 이상하게도 키 크고 잘 생긴 남자들의 프로포즈가 잦았다. 난 순정만화에서 금방 튀어나온 듯 한 다정하고 멋진 남자와 첫사랑을 했다. 사랑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남자친구를 보면서 ‘이게 꿈인가 생신가’했다. 다리 밑에서 주워온 미운 오리새끼의 부활이다.

 

 

 

 

경선 – 설움으로도 웃게 할 수 있는 능력

 

웃긴데 뭉클한 뭔가가 있는 글. 문장이 간결해지면 매력적인 글을 쓸 잠재성이 있어요. 글을 배우는 초기에는 주제를 한 가지씩 잡고 깊게 오래 들여다본다는 마음으로 써요. 이 글은 ‘가족과 설움’이 주제가 되겠죠.

 

 

-날 보면 항상 ‘미스코리아 강’ 이라고 놀려대던 아버지에게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다. 설움은 무언가 바라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했으니 당연히 서러움도 이제 없다. 아버지는 점점 그냥 현재 지구에 같이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 거리가 멀어져가고 있다. 사실 이렇게 되기까지 아버지에게 서러움도 느꼈었고 어느 순간, 분노, 미련, 배신감, 섭섭함 등 많이 느꼈다가 시간이 지나니까 아버지자체가 무감각 해졌다.

 

 

-> 분노, 미련, 배신감, 섭섭함 등으로 퉁치고 가기엔 중요한 감정이에요. 뭐가 왜 서러웠고, 그 서러움에 본인은 어떻게 반응했는지 한번 차분히 정리해보는 작업도 좋을 것 같아요. 그 과정이 없으면 설움이 잠복해있다가 살다가 불쑥 나와서 투정부릴지도 몰라요.

 

 

-설움의 주체가 대부분 현재를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나’ 이거나 나의 ‘가족’이었다.

-> 나는 서럽다. 이렇게만 써요. 설움은 당사자만 느끼는 속살 같은 감정이라 나의 가족이 설움을 느낀다고 내가 말하는 건 무리에요. 현재를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나, 라는 표현은 모호하고요. 치열하다는 건 주관적이니, 하루 일과를 나열하는 게 맞고요. 이정도면 저 사람 치열하다는 생각 들게요.

 

 

-내 공부하기 바쁘고, 아르바이트, 대학 생활, 사회생활, 가족생활 외에 할 게 너무나 많다. 가족이 서로 이해할 수 있는 폭이 작아지다보니 이제 싸우는 것도 피해버린다. … 가족 간에 따져봤자 답이 안 나온다. 결국 설움조차 비워내는 게 맘이 편하다. … 설움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살면서 만난 동료들에게 찾아도 괜찮을까?

 

 

->가족, 친구, 동료 누가 나의 설움을 달래줄까. 설움 소통에 대한 열망이 보여요. 그걸 더 붙들어보세요. 내가 누군가의(엄마?) 게워낸 설움을 받아주는 사람이 되는 것도 한 방법이죠. 내가 안하는 건 남도 안 하니까요.

 

 

-오프라인으로 뜨겁게 만났다가 헤어짐을 좀 받아들여야 하는 시간이 필요했었다. 그런데 이별은 없었고 계속 반가움만 있으니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설움을 게워낼 때가 제한적이다. 가족에게도 풀어내기 어려운게 설움인 것 같다. 자유롭게 설움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고 그런 사람을 앞으로 쭉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톰슨가젤 – 솔직함의 민낯이 아름다워질 때까지

 

“첫 연애를 하고 이별하게 될 때 너는 크게 아플지도 모르겠다.” 첫 문장이 강렬하네요. 문장도 간결하고 전체적으로 잘 써진 글입니다. 그런데 좀 싱겁고 재미없다고 할까요. 마치 상처가 두려워 연애 안 하는 것처럼 글에서도 조금만 내어준 느낌입니다. 일부러는 아니고, 성정이 그러신 것 같아요. 이 덤덤함으로 표현할 수 있는 또 한 세계가 있을 텐데요. 계속 자기탐구를 하는 글을 써서 그것의 미학을 발견해보세요.

 

 

8년간 연애 안 해본 것은 그럴 수 있는데, 끌림이 있어도 일시적 감정이라고 다그친 것.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하네요. 왜 피했는지. 아플 것이라는 감정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건지. ‘타인의 평가를 걱정했다’고 진단했는데 그것 역시 언제부터 그랬을까요. 부모님이 엄격하셨는지, 장남인지 등등 사회적 정보가 더 필요합니다. ‘비정규직이라는 자리, (무명) 배우라는 자리, 만년 2등이라는 자리…’ 이거 톰슨가젤님 이야기에요? 명확히 명시되어 있지가 않네요.

 

 

-언젠가 마주해야 할 진실을 자꾸만 뒤로 미뤄놓고 하루를 사는 기분. 나는 아직 아프지 않았고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해본 적이 없다. …타인의 평가를 걱정했다. 어쩌면 그것이 주저하게 하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외면하게 한 근본 원인인지도 모른다. 나는 누군가의 말 하나하나에 가시를 뾰족하게 세우고 그 말들이 마음에 생채기를 내지 않도록 신경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기 삶을 살아본 기억이 드물다. 사랑도 연애도 직업의 선택과 미래에 대해서도 주도권을 잡기보다 내줬고, 내게 중요한 것들을 중요하지 않게 대하는 법을 익혔다.

 

 

-> 자기감정 억압한 채로 사랑을 미룬 채로 살기엔 생은 너무 길고 지루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피하는 것보단 내성을 기르는 게 삶에 유리합니다. ‘민낯을 봐야 달라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선언 지지합니다.

 

 

내복곰 - 문장이 길면 반드시 엉킨다

 

 

생각은 뒤엉키게 마련이지만 (그게 정상이지만) 글은 그것을 한올씩 뽑아내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거겠죠. 문장으로 만들 수 없는 생각은 생각이 아닌 거예요. 글쓰기는 내 생각의 실체를 확인하는 일. 그런데 아래 글은 실체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주어 동사가 꼬여서 그래요.

-시간이 붙잡고, 시간에 밀리고, 퇴적된 시간에 비례하여 나는 얼마나 자유로워졌는가에 대한 자책과 회의, 자유의 원형을 찾아가려는 김수영의 노력들은 시간 속에 매몰되어 가고 그것이 설움으로 돌아오는 듯하다.

-> 주어가 ‘시간’인지 ‘나’인지 ‘김수영(의 노력들)인지 불분명해요. 몇 가지 사실이 엉켜있죠. 1)나는 시간에 밀리고 붙잡히면서 살아왔다. 2) 그 시간에 비례하여 얼마나 자유로워졌는지 자책과 회한이 든다. 3) 김수영은 자유의 원형을 찾아가려고 노력했다. 4) 그런 노력이 시간 속에 매몰되어 가면서 설움으로 돌아온다.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의 구분, 나에게 놓여진 선택과 기회들을 이리저리 재고, 다른 사람의 선택과 기회, 행운이라는 변수, 나라는 사람을 처음부터 한계 지워놓았던 장치들, 예를 들어 대한민국, 여자, 7080세대, 무남독녀, 숏다리 등등 이제는 웬지 모르게 불편한 단어가 되어버렸다.

-> 1) 나는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한다. 2) 나는 주어진 선택과 기회들을 이리저리 잰다. 3) 다른 사람의 선택과 기회, 행운이라는 변수 (의미전달이 안 됨) 4) 나를 한계짓는 장치들 - 대한민국, 여자, 7080세대, 무남독녀 숏다리 등등은 이제 왠지 모르게 불편한 단어가 되었다.

 

 

-나는 난데,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아주 손쉬운 분류조차 되질 않는다. 시간이 갈수록 마음은 더 급해지고 마냥 서럽기만 하다. 자유와 욕망을 마음껏 혼동하여 야무지게 버무렸던 그 시간들이 차라리 그리웁다.

-> 이 문단은 좋습니다. 문장이 짧아서 내용이 파악되죠. 왜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급해지는지, 어떤 걸 욕망하는지 차차 한 문장 단위로 얘기해보면 좋겠네요.

 

 

 

 

다리 - 일기, 날마다 쓰기의 힘

 

저력 있으세요. 술술 이야기를 풀어가듯 이야기가 전개되네요. 특별한 수사를 쓰지도 않는데 글에 고유의 느낌이 살아있어요. 자기만의 어투, 발성, 리듬 등 문체가 있는 글이라는 점에서 훌륭합니다. 일기 쓰며 살아온 삶과 일기를 회피하며 살아온 삶이 대비가 잘 됩니다. 일기장 화형식, 소로우의 글 등 적당한 에피소드와 자료가 글을 풍부하게 하네요.

 

 

-그러고는 하루아침에 매일 일기를 쓰는 것은 힘든 일이 분명하니 연습이 필요하단 생각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 일기를 쓰기 위해 일기를 연습했다? 하하. 앞의 일기와 뒤의 일기를 구별해야합니다. 단어를 다르게 변주하던가 수사를 보충해주세요. ‘매일 일기를 쓰는 일이 하루아침에 가능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 글쓰기 연습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하루에 한 장씩은 일기장을 채웠다.’

 

 

-그러니까 열아홉 살의 일기는 이십대의 치열을 기록하기 위한 연습이었던 것이다. 그 일기장은 지금은 없다. 연습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는지 스무 살이 되는 날 집 앞 마당에서 다른 많은 수험 노트와 수험서들과 함께 태워버렸다.

-일기는 인생과 생생히 맞닿아 있다. 아니, 어쩌면 모든 글쓰기가 그러할 것이다. 그리하여 수영은 설움을 겪으면서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쓴 것이 아닐까. 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인생과 생생히 대면하기 위해 말이다.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 내가 살아난다. 살아난 나를 쓰는 순간은 즐겁지만 그 시간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밤을 새거나 생각에 골몰하거나. 나는 그런 살아남이 두려웠다. 밤을 새다가 출근 시간을 어기게 될 까봐, 다음 날 보내야 할 빽빽한 일정을 소화하지 못할까봐 두려웠다. … 히드라의 머리마냥 솟아나는 여러 개의 나를 하나의 몸통에 부여잡기 위해서라도 다시 써야한다고 결론을 내려 버린다. 어쨌든 이 편이든 저 편이든 써야만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벌꿀 - 디테일에 걸려 넘어지지 않기

 

낡은 필름이 돌아가는 영화 같기도 하고, 어릴 때 보던 TV문학관 같기도 하고, 헌책방에서 구한 단편집의 첫 페이지 같디고 합니다. 벌꿀님이 들려주는 유년일기는 질감이 참 특별해요. 무심하게 생생하달까. 다만, 글 호흡을 늘리는 일이 관건입니다. 벌꿀님이 늘 부딪쳐서 주저앉는 지점이 있는 것 같아요. 담벼락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벌꿀님. 손 내밀어드리면서 조르고 싶네요. 어여 더 이야기 들려주세요. 아래 문장은 정말 팽팽하게 긴장감 넘치고 아람답네요.

 

 

-하얗고 차가운 겨울 햇살 아래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되는 그 풍경은 흡사 한편의 익살극 같았다. 배우로 치자면 개는 ‘버스터 키튼’ 같은 위대한 희극배우였다. 익살의 타이밍을 알고 있었고 시나리오를 꿰뚫고 있었다. 연립주택에 사는 어른들은 극 내내 헛발질 하는 조연이었고 그들의 자식들, 내 또래의 몇몇 아이들은 커튼 뒤에서 호기심 가득 찬 눈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히죽히죽 웃는 관객이었다. 제 1막이 끝났다.

-아랫집 할머니가 장대 빗자루를 들고 개를 내려치고 있다. 어리둥절하다. 마당에 개 두 마리가 보인다. 할머니가 혼잣말을 한다. 저렇게 붙은 건 뜨거운 물을 붓기 전엔 안 떨어져.

 

 

 

이슷 - 살다간 자의 날선 감각으로

 

한번은 꼭 써야할 얘기. 기대가 되는 미완의 글입니다. 앞부분이 어수선해요. 나는 해방촌의 빈집에서 살았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가면 어떨까요. 한국사회에 의미 있게 언급되는 주거공동체, 정의되는 것들의 의미목록 외에도 다른 결의 주거체험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게 신선합니다. 가령 ‘안전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라’고 했을 때 그런 말이 놓치는 부분이 있죠. 집보다 거리가 더 안전하여 출가한 청소년들의 자기발언이 의미 있듯이 다양한 구성원의 발언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살아온 자, 그러나 지금은 궤도를 이탈한 자의 이야기는 언제나 치열하고 재미난데, 말년병장이 가지는 노련함과 이슷 특유의 재치가 돋보이는 글입니다.

 

 

-그래, 사람은 단 하나 때문에 살지 않는다. 사는 이유가 여러 개로 짬뽕 된 곳이었다 해두자. 사는 이유는 사람마다 제각각이었고, 한 사람의 이유조차도 여러 개가 섞여 있고, 그것 마저도 시시각각 변하는 곳. 삶의 일시적인 상태가 모여 가늘고 길게 줄지어져 만들어낸 어렴풋한 모습만 잠시 동안 가질 뿐이다.

 

-철제 도미토리 침대 한 칸이 집에서 가장 오랜 기간 가질 수 있는 사적 영역이었는데 ,그 마저도 한번 씩 돌아가면서 쓰곤 했다. 도무지 내 손 탄 것이 머무를 수 없는 공간에 마음이 머무를 곳도 없었다. 모두에게 열려져 있는 그곳에서 언제 닥칠지 모를 처음 보는 손님을 위한 환대를 장착하고 사느라 십분 대기조의 긴장이 지속되었다. 물론 나 역시 그 열린 문을 통해 그곳에 입성했고, 장기 투숙객이란 이름으로 살았다.

-때가 되면 싹이 트고 줄기가 자라 꽃이 피는 (일정부분 자연스런-삭제 권유) 식물의 생장처럼, 시간은 대단한 권력은 아니어도 말년 병장이 가지는 공간에 대한 편안함을 주었다.

 

 

 

 

김유민 - 혈색이 도는 글을 쓰려면

 

나, 선택, 결정, 부자유, 내면화, 시선, 타협, 강함, 안정, 평범함, 거친 세계, 무기력, 나태, 안주, 불안, 행복, 모순, 방황, 자기극복, 느낌, 의미….

이 글에서 사용된 단어들입니다. 관념적인 단어의 편식이 심하죠. 말이 너무 크고요. 글이 창백해요. 땀냄새가 나고 혈색이 도는 글을 써보려면 (김수영처럼) 일상의 자잘한 생활단어를 많이 써보세요. 여러 색깔의 식품군을 섭취하듯이 다양한 말들이 필요해요. 그렇지 않으면 여러 편 써도 계속 맴도는 얘기가 반벅되거든요.

 

 

-출생 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최근 수년간 쌓아온 무기력하고 나태한 삶의 관성을 끊어내지 못하고 끌려들어간다.

->출생 후부터라면 어떤 독특한 성장 배경이 있었는지 정보를 주어야 독자가 이해합니다.

-나의 불안의 이유를 스스로 깨닫게 된 그 찰나, 사실 나는 행복했던 듯하다. 모순과 불안, 방관의 순환고리를 단호하게 잘라낼 때가 드디어 왔음을 느꼈다. 그 순간의 느낌으로 끝내지 않고 행동에 착수할 것임을, 자기극복을 열어갈 것임을, 이로써 한 단계 나아갈 것임을 느꼈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순간들이 그저 흘러가 버리고 잊혀져버리게 두는 것을 나는 견디고 싶지 않다. 우리가 숨쉬며 살아온 수많은 날들과 수많은 밤들 중 기억하는, 기억할 만한 날들, 순간들은 몇이나 될까?

-> 기억은 현재와의 투쟁이죠. 기억할 만한 순간은 그냥 떠오르기도 하지만 글 쓰면서 발굴하는 것이기도 해요. 앞으로 한 편씩 끄집어서 스토리로 만들어보세요. 삶에 혈색이 돌고 글도 또렷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