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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인터뷰

이윤상 - 여성의 집단기억 봉인 푸는 페미니스트

한겨레 박승화

 

새까만 눈동자에 설핏 물기가 오르곤 한다. 소행성B-612호에서 온 전령사처럼 짧은 곱슬머리, 날렵한 재킷에 긴 스카프를 둘렀다. 호쾌한 웃음과 수다에 열띠다가도, 갓 난 송아지처럼 물끄러미 보다가 고인다. 눈에 눈물이 어리면 그 렌즈를 통하여 하늘나라가 보인다고 함석헌은 말했던가. 초점을 잃고 사라지는 사물들을 지나 눈물렌즈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어떤 세계를 향한 그리움일까.

언어 대신 상징으로 답을 청했다. 그녀가 가방에서 타로카드를 꺼냈다. 옥빛 융단이 깔리고 동그란 카드가 몽글몽글 흩어진다. 잰 손놀림이다. 78장의 상징화. 구상과 서정추상 사이 평평한 그림들, 압도적 느낌들. 태초의 그날처럼 삶이 가득하다. 거기서 카드 두 장을 찾은 그녀가 신분증 제시하듯 멋쩍게 내민다. 생년월일에 따른 별자리가 있는 것처럼 누구나 자기만의 타로카드가 있다. 그녀의 상징은 현자(Crone)와 달(Moon)이다.

하느님이 남자예요? 누가 그래요?

“현자는 밖으로 확장하고 추진하기보다 내면 성찰적인 성향을 의미하고, 달은 무의식을 뜻해요. 아마 저한테 외향적이지 않은 면이 있는 거겠죠. 다른 수준의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있어요. 무의식에 한번 가닿아보고 싶어요. 그게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이윤상은 전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이다. 1992년 자원활동가로 시작해 2012년 소장 임기를 마쳤다. 20년 장강 같은 세월, 깊고 짙은 인연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1991년에 생겼다. 이미 마련된 반성폭력운동의 장에 그녀가 몸담은 게 아니라 그녀의 몸에 반성폭력운동의 장이 형성된 셈이다.

스무 살 어느 봄날이다. ‘다른 수준의 정신적인 것’에 관한 물음의 씨앗이 강의실로 날아들었다. 필수교양 과목인 기독교문학 시간. 서른셋 젊은 나이에 교수로 부임해 화제가 된 현경 교수가 강단에 올랐다. “여러분. 하느님이 남자예요? 그럼 자지가 있어요? 본 사람 있어요? 하느님이 백인이에요? 누가 그랬죠?” 당시는 빈곤과 인간 소외를 핵심으로 한 해방신학, 남성 위주 가부장제에 대항하는 생태여성신학 등 새로운 기독교 신학운동이 활발했다.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새내기 대학생은 가슴이 뛰었다. 기존의 상식을 이탈한 ‘다른 목소리’는 고정관념을 신나게 흔들었다. 인식만 파격이 아니라 인디언처럼 머리를 길게 땋은 외모도 신선했다. 교수에게 느낀 발작적 존경심은 지식과 진실에 대한 열정의 불을 제대로 지폈다. 전공인 교육공학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참이었다. 철학과 복수전공을 택했다. 숨통이 트였다. 인간의 삶과 세계의 질서를 탐구하는 그런 공부가 좋았다. 철학과 조교 언니들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는 담배마저 빛나 보였다. 평범한 것보다 색다른 것, 응용학문보다 순수학문에 관심이 기우는 자신을 보고 느꼈다. 매우 실질적인 사람인 줄 알았는데 실은 “가슴 깊이 겉멋이 있는 사람이었던 거다.”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는 귀인은 또 한 번 나타났다. 대학 4학년 때 교양여성학 특강에 초대된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 정경자 선생이다. 이번에는 ‘다른 수준의 육체적인 것’의 물음이 던져진다. “여러분 중에 성폭력 피해를 받아본 분 손 들어보세요.” 학생들은 잠잠했다. 강사가 말하기를, 저는 피해가 많은데 여기는 한 분도 없으시냐고 하더니 강의를 이어갔다. 성폭력이란 극단적인 폭력뿐만 아니라 신체적·정서적·언어적 폭력을 포괄한다고, 성폭력 공포 때문에 배낭여행을 못 가고 밤에 외출을 못하는 것과 같이 일상을 옥죄는 것도 피해의 범주에 속한다는 내용이었다. 강의가 끝나고 성폭력 피해를 입은 사람 있느냐고 다시 물었을 때 절반 이상의 학생들이 손을 들었다. 윤상의 손도 스르르 올라갔다.

운전면허 취득 10년 걸린 까닭은

윤상은 딸 셋의 장녀다. 첫째에 대한 기대와 지원을 받았고 자매끼리 자라서 별다른 차별을 경험하지 못했다. 중학생 때다. 아버지는 아들과 테니스 치는 친구가 부럽다고 말했다. 딸이랑은 못 칠 게 뭐 있겠느냐며 오기 반 호기심 반으로 테니스를 배웠다. 어느 날 레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등 뒤에서 갑자기 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다다다다…. 어떤 남자가 순식간에 뒤에서 몸을 만졌다. 소녀 윤상은 얼음처럼 그 자리에 굳었다. 소리를 지르지도 손가락질을 하지도 쫓아가지도 못했다. 더 놀라운 것은 뒤에서 뛰어오던 그 남자는, 소녀의 앞을 가로질러 무심한 보폭으로 유유히 걸어갔다는 점이다. 벌건 대낮 집 앞에서 벌어진 일이다.

대입 시험을 치르자마자 고3 겨울방학에 운전면허학원에 등록했다. 교육과정 막바지에 담당 강사가 결근해 젊은 남자 강사가 대타로 들어왔다. 자동차라는 폐쇄된 공간에 둘만 있는 게 어쩐지 오싹했다. 강사는 차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위치에 자리하고 수강생은 수동적인 상황에 처한다. 아니나 다를까, 강사는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은근슬쩍 허벅지를 만졌다. 끝나고 뭐해? 커피 한잔 할까? 툭툭 손가락으로 찔러보듯 말을 건넸다. 그 시간이 천년만년같이 길었다. 이후 그 강사와 마주칠까 노심초사하며 간신히 학원을 다녔다. 운전면허시험을 봤지만 출발하자마자 떨어졌다. 그때부터 발길을 끊었다가 10년이 지나고서야 운전면허를 취득했다.

“이런 일이 대수롭지 않게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기득권자들이라면 어떤 경우에 자기 기회를 10년씩이나 유예하겠어요. 그건 삶 속으로 어마어마하게 깊숙이 들어와서 찌르는 경험이에요. 또 갑자기 성폭력을 당하면 극심한 공포를 느껴요. 얼어붙은 공포(Frozen Fright)라고 하죠. 이런 경험이 여자와 달리 남자는 일상적이지 않으니까 공감하기 어려워요. 특히 판사 같은 남성 법조인은 더 몰라요. 그러니까 그때 왜 저항 안 했느냐, 왜 소리 안 질렀느냐, 말만 했어도 넌 구제됐을 거다,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사람이 살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지만 모든 경험에 이름이 붙지는 않는다고 윤상은 말했다.

“저 같은 피해 경험이 과거에는 이름이 없었어요. 지금은 ‘성폭력’이란 단어를 아이들도 알지만 그땐 무섭고 두렵고 뭔가 이상해서 엄마한테도 말 못하고, 망각으로 자연스럽게 흘려보낸 거죠. 그게 몸의 기억인데 그 불쾌함, 기분 나쁜 기억이 망각 회로에 갇혀 있다가 그날 강의를 듣고 나서야 ‘성폭력’이라는 이름을 얻은 거예요.”

이것이 ‘명명의 정치학’이다. 윤상이 다른 자리에서 자신의 피해 경험을 꺼내면 대부분의 여성들이 “맞아 나도 그래” “그런 적, 나도 있어”라며 맞장구를 친다. 이렇게 여성이라는 하나의 큰 범주가 공통적으로 갖는 경험에 이름이 없다는 것은 엄청나게 정치적인 일 아니겠는가 묻는다. 여성의 피해를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일로 만들거나 무화하려는 가부장 권력에 맞서서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더없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대학교 4학년 때 이 모든 구조적 모순과 대안적 인식을 획득할 수는 없었지만 강의를 듣고 나자 윤상은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자신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 보통의 경험 보통의 여성을 위한 단체임을 알았다. 자원활동가를 환영한다는 강사의 말에 용기를 내어 한국성폭력상담소를 찾아갔다. 학교를 다니면서 일주일에 하루씩 출근했다. 언론사에 팩스 보내기, 사서함에서 우편물 찾아오기 같은 심부름을 하고 어깨너머로 실무와 언어를 익혔다. 1994년 ‘서울대 우 조교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서명을 받았다. 때로는 법원 앞에서 피켓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간이 오그라들고 펴지기를 반복하면서 배짱을 두둑이 키웠다.

대학원에서도 고난도 ‘실전 훈련’은 계속됐다. 학부 때부터 오매불망 동경해온 여성학과 대학원에 입학했다. 무엇 하나 간단치 않았다. 읽어야 할 책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쏟아지는 말도 죄다 어리둥절했다. 너 이성애자니? 결혼은 왜 하는데? 그거 진짜 네 생각이야? 등등. 매사 문제제기를 하는 친구들과 부대끼고 토론하는 게 일상다반사였다. 자기를 하나하나 설명해내야 했다. 성 정체성은 다양한데 내가 이성애자인 게 고민 없이 된 것 같고, 이성애자여서 미안하다 할 수도 없고, 다시 생각해보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기성찰이 끊임없이 요구되는 삶을 살아내고 나니 진이 다 빠져버렸다. “혈기왕성한 20대여서 버틴 것 같다.” 우여곡절 끝에 ‘여성들 사이의 같음과 다름의 딜레마 해결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논문을 써서 통과됐다. 대학원까지 공부시켰더니 월급 40만원이 웬 말이냐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윤상은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로 정식 출근했다.

그렇게 페미니스트 생활인이 되다

시인 김수영은 평소 후배 문인들에게 독서와 생활을 혼동하지 말라고 이르곤 했다. 독서는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생활은 뚫고 나가는 것이라는 게 시인의 지론이었다. 어디 문인에게만 해당될까. 잘 익히고 잘 살고픈 이들이 직면하는 과제였다. 윤상도 그랬다. 20대까지가 온갖 금기와 상식에 도전하는 사유를 받아들이는 시기였다면, 30대로 들어서면서 현장에서 난제를 풀어가며 일상을 뚫고 나가는 시기가 도래했다. 시민단체 활동가로서 ‘윤상의 생활난(生活難)’은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과 소장으로 일하는 동안 본격화된다. 크게 꼽자면 세 가지다. 돈과 사람 그리고 언론으로 대변되는 사회적 통념.

우선 돈. 윤상이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자리를 제안받고 가장 망설인 이유다. 활동가 12명의 급여를 꼬박꼬박 챙겨주면서 일하려면 후원회원을 관리하고 크고 작은 기부를 끌어내야 한다. 아무리 명분이 정의로워도 돈 부탁이 쉬울 리 없다. 원체 성격도 소심하다. 그런데 소장이 되고 나자 “급해지면 별짓을 다할 수 있구나”를 알았다. 직·방계 가족은 물론 엄마 친구, 먼 친척에게까지 후원회원 신청서나 1일주점 티켓을 ‘넙죽’ 내미는 자신을 발견했다. 다음세대재단의 전문가를 초빙해 교육도 받았다.

“전도랑 똑같대요. 대뜸 교회에 가자는 게 아니라 장기 계획을 세우고 평소 관심사를 살피다가 적기를 택해 요구하라는 거죠. 만약 거절당해도 그건 상대방의 몫이지 내 잘못이 아니니 상처받지 말라고 하고요. 우리는 성공사례 나누기랑 스티커 그래프 붙이기도 했어요. 먹고살려면 할 수 없어요. 이렇게 해야 돼. (웃음)”

이 대목에서 살아갈 이유가 있는 사람은 어떤 고난도 이겨낸다는 니체의 말을 떠올리기엔 좀 이르다. 윤상에게 사람 문제는 돈 문제보다 더한 자기초극을 요했다. 조직은 기본적으로 위계 구조다. 시민단체는 평등하고 민주적인 조직을 지향한다. 조직의 효율성을 얻으면서도 민주적인 조직을 실험하지만 모든 것이 매뉴얼화될 수는 없는 노릇. 의사결정 방식을 둘러싼 내부 갈등에 고충이 컸다. 활동가가 그만둔다고 하면, 윤상은 ‘내가 잘못한 거 같다’며 사과하곤 했다.

“안 흔쾌하죠. ‘에라, 네가 다 해라’ 이 말이 여기까지 차오르지만 꾹 참아요. 하하. 정말 어떤 때는 하루 종일 사과만 하는 거 같았다니까요.”

이게 다 인과응보라고 여긴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신입 활동가 시절 최영애 소장과 일했는데, 자기 역시 소장에게 왜 맘대로 결정하느냐고 사사건건 따졌다. 소장을 미워한 걸 뒤늦게 반성한다며 자숙 모드로 빙그레 웃는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러나, 제아무리 대인배 소장을 지향해도 서운한 건 서운한 거다. 특히 자신을 저임금으로 노동자 부려먹는 고용주로 대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때, 설움에 복받쳐 기어이 입을 뗀 적도 있다. “나, 너네들이랑 똑같이 적은 월급 받고 일하거든. 나도 피고용인이거든.”

씻을 수 없는 고통 아니거든요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성폭력 생존자와 직접 관계를 맺지는 않는다. 고통받는 이들과 상담하고 일을 처리하는 건 활동가다. 각자 맡은 사건과 피해자가 백이면 백 전부 경우가 다르다. 그럴 때 동료들끼리 동료상담(Peer Counselling)을 한다. 각자의 이야기를 듣고, 너 이게 힘들구나, 이런 상태구나 얘기해준다. 일이 너무 바빠 서로 얘기할 시간이 없으면 두 배로 힘들다. 어려운 사건을 승소하면 되게 기쁘지만 승소 이후에도 힘든 일은 끝나지 않는다. “술이 필요한 순간”이 자주 찾아온다. 특히 언론의 성폭력 관련 보도 행태는 늘 안타깝다.

10년 전쯤 활동가 시절, 윤상은 기자들에게 이런 전화를 받았다. 여름이라 피해가 많죠? 20대 여성이 여름에 과다한 노출을 하고 다녀 피해가 발생한다고 생각하는 거다. 여기에는 남자들의 성욕은 불가피하다는 가부장제의 논리가 깔려 있다. 여자가 짧은 치마를 입은 것, 노래방에 가서 춤춘 것, 밤에 귀가 안 한 것 등을 전부 성범죄의 구실로 삼는다. 몇 년 전, 한 일간지에는 성매매를 단속해서 성폭력 사건이 많이 일어난다는 기사도 실렸다. 성매매를 막으면 여염집 여자가 피해를 입는다는 발상은 여자를 마리아 아니면 창녀로 보는 이분법적 사고다.

“성폭력은 대개 계획된 범죄예요. 자기가 제압할 수 있는 상대를 고르거든요. 매사에 당당하고 내일 기자회견 할 수 있는 여자를 선택하지는 않죠. 근데도 사람들은 성폭력이 충동적이고 우발적으로 일어난다고 생각해요. 언론 보도도 그래요. 조두순 사건 같은 것만 성폭력 피해의 전부인 양 부각시키죠. ‘성폭력 피해는 무조건 씻을 수 없는 상처래.’ 말해주고 싶어요. 씻을 수 있거든요! 죽지 않거든요!”

갈 길은 멀다. 윤상은 그간 수많은 자리에서 강의하며 잘못된 사회적 통념을 바꾸기 위해 열변을 토했다. 성희롱예방교육이 의무화된 지도 어느덧 15년이다. 그런데 관례적이고 일방적인 교육으로 의식을 바꾸기에는, 100년쯤 뒤면 모를까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더군다나 포털 사이트에는 날마다 성폭력 관련 기사가 최고의 페이지뷰를 기록한다. 극단적인 사례 위주로 보도되다보니 집·직장·학교에서 발생하는 일상적인 사건은 문제제기조차 되지 않는 실정이다. ‘사이코패스’만이 아니라 ‘멀쩡한’ 가해자가 얼마나 많은지, 그럴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사회적 학습 기회가 마련되지 못한다.

“저를 포함해서 활동가들은 언론에 대한 불신이 커요. 선정적 보도 태도 때문이죠. 피해자가 주어가 될 때조차 아이의 피해를 그렇게 낱낱이 알려야 하는지 안타깝고, 얼마나 죽지 못해 고통스러운지를 부각하는 방식도 참 나쁘고요. 피해 당사자가 나서서 언론에 발언해야 하는데 안전한 공간이 어디에도 없었어요. 편견과 비난에 대한 걱정 없이 힘들고 아팠던 걸 말할 수 있으려면, 당사자 발언을 들을 수 있는 수준의 사회가 되어야겠죠.”

내 얘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준 유일한 사람

서울시 시민인권보호관 이윤상.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임기를 마치고 1년간 꿀맛 같은 백수 생활 뒤에 얻은 새 명함이다. 계약직 공무원 신분으로 시청에서 근무한다. 유리 건물의 ‘온실효과’에 따른 여름철 무더위만 아니라면, 일할 맛 난다. 급여 수준이 양호해졌다. 첫 월급을 받고는 감격스러워 휴대전화 카메라로 통장을 찍어 남편에게 보냈을 정도다. 가난한 활동가들과 만났을 때 술값과 밥값을 내는 것으로 부의 사적 재분배에 기여한다. 하는 일은 서울시 유관기관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성희롱 등 인권침해 관련 민원 처리인데, 윤상은 또 눈이 커지면서 마른 침을 꿀꺽 삼킨다.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직장여성 잔혹사의 구조와 원인 및 대처 방안을.

아이들은 가족, 친·인척, 선생님 등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는다. 가족관계를 벗어나는 성인들은 직장에서 성희롱을 당한다. 어린아이한테는 부모가 생존권이고, 성인은 직장(상사)이 생존권이다. “성폭력은 생사여탈권을 쥔 사람이 약자에게 가하는 폭력이다.” 여성 직장인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더럽고 불쾌한 경험들. 직장생활이 다 그런 거야, 라며 회자되는 일들. 회식 때 주물럭거리던 남직원은 이튿날 당당히 출근하고 여직원은 아프다고 휴가를 낸다. 우울증 약을 먹고 직장을 다니거나 급기야 사표를 낸다. 직장여성의 아픈 역사다. ‘직장 내 성희롱’이라고 명명하면서 더 많은 여성들이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됐는데, 여전히 대다수는 당하면서도 참고 산다. 윤상이 제안하는 해법은 ‘말하기를 통한 연대’다. 직장 내 성희롱도 상습범이 정해져 있다. “한 놈이 또 한다.” 피해자가 다수일 때가 많다. 그런데 정작 피해 여성들은 서로가 서로를 모른다. 당하고도 어디다 말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 “김 과장만 땡큐다”.

“모든 여성이 경험하는데 모든 여성이 얘기하지 않아. 아마 국가정보원도 이만큼 보안 유지는 못할걸요. 평소에 시시콜콜 잡담하면서도 성폭력 얘기는 빠지거든요. 무겁게 얘기하자는 게 아니라 공통의 경험이라는 걸 공유하자는 거죠. 일상에서 여성 연대가 필요하고, 연대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한국성폭력상담소도, 시민인권보호관도 관계에서 고통받는 약자를 만나는 자리다. 우리 사회가 아픈 사람들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윤상은 절절히 세세히 목도했다. 담당 사건이 잘 해결될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비밀스러운 자기 언급 뒤에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내 얘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준 사람은 당신이 처음입니다.”

별일 없이 살지 못하는 사람들. 말하고 싶어도 말할 데가 없거나 말이,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논리적·합리적·이성적 잣대에 걸려 미끄러지는 말들. 그걸 더 온전히 듣기 위해 윤상은 타로를 배우고 철학을 공부한다. 철학이나 타로나 사람들 삶에 관계된 질문을 해석하는 하나의 방편이다. 본디 상징은 로고스의 독점을 억제하는 힘이 있다. 고도의 상징화인 타로카드를 통해, 로고스의 독점을 해체하면서 열리는 자유의 공간, 말씀이 아닌 목소리가 활개 치는 시간을 향유하는 것이다. 윤상은 시민인권보호관이 되고 얼마 뒤 워크숍에서 동료들의 타로점을 봐주어 인기를 끌었다. 사람 사이 벽을 허물고 말을 나누고 마음의 화평을 돕는 좋은 매개로 삼는다.

윤상에게 무엇보다 힘이 되는 건 페미니스트 동지들이다. 징한 관계다. 울고 웃고 지지고 볶다가 정들고 철든다. 이를 두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 받침의 모서리가 닳으면 그것이 사랑이고, 사각이 원이 되는 기적이라고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말했다. 윤상은 두 글자로 ‘성불’(成佛)이라고 표현한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대표나 활동가를 구할 때 써먹기도 한다. 이 자리가 돈이나 명예가 생기는 건 아니지만 임기를 마치고 나면 성불할 수 있다고. 그러면 이런 답이 돌아온다. 별로 성불하고 싶지 않다고.

“사실 성불은 모르겠고 소장 하고 났더니 세상에 무서울 게 없고 못할 일이 없어졌어요. 일이 힘들어서 피폐해지지 않을까 싶지만, 그런 사람은 중도 하차하죠. 희망이라는 고문을 꽉 붙잡아야 해요. 인간에 대해서 믿고 사랑하지 않으면 못하죠.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돼요. 소장 할 때 인터뷰하면 무슨 힘으로 일하냐고들 많이 물어보던데, 힘은 딱 하나예요. 동료밖에 없어요.”

의사소통이 되는 존재. 많은 사람들이 놓치는 이 사회의 아픔을 깊이 바라보고 통찰하는 존재. 그들이 있어서 뭐라도 도모해보고 있으니 그런 밑천을 가진 건 “나의 대단한 재산”이라며 으쓱해한다.

가만히 응시하면 보인다. 능히 겨워서 웃을 때도, 못내 치밀어오를 때도, 몸소 서러워 말할 때도 잠시 잠깐 무엇이 어룽거린다. 그럴 것이다. 이 세계의 남루함을 삶의 신비함으로 변환시키는 장치가 신체 어딘가 장착돼 있어야 인간은 살 수 있을 것이다. 윤상에게는 그것이 눈에 어린 물빛이 아닐까. 어느 시인도 “아무 병(病)도 없으면 가시내야/ 슬픈 일 좀,/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고 봄을 노래했으니….

 

 

* 2014년 4월호 한겨레 사람매거진 <나들> '내 몸, 파르헤시아'에 실린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