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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인터뷰

김수경 - 아동성폭력 피해자의 엄마

[내 몸, 파르헤시아]딸은 엄마에 엄마는 딸에 공유된 기억  
 
 
세 명의 엄마가 있다. 영화 <마더>의 엄마(김혜자)는 살인사건에 연루된 장애인 아들을 구하기 위해 다른 지적장애아에게 누명을 씌우고 마더에서 머더(murder·살인자)로 되어간다. 광기와 폭력의 왜곡된 모성은 말한다. “아무도 믿지 마, 엄마가 구해줄게.” 영화 <한공주>의 공주 엄마(성여진)는 전화번호까지 바꾸고 다른 남자와 산다. 거세된 모성의 리비도는 오직 자기 욕망과 생존으로 쏠리고 3년 만에 찾아온 딸에게 말한다. “엄마도 힘들어. 다신 찾아오지 마.” 영화 <말아톤>의 엄마(김미숙)는 자폐를 앓는 자식에게 ‘백만불짜리 다리’라며 주술을 건다. 희생하고 헌신하는 전능한 모성은 말한다. “내 소원은 초원이 죽은 다음날 죽는 것이다.”

자식의 고통 앞에 선 모성은 각 영화에서 하나의 인격으로 극화하지만 현실은 좀 다르다. 여러 갈래의 모성 충동이 한 사람의 신체에서 길항하다 상황에 따라 돌출된다. 성폭력 피해 아동 유정(가명)이의 엄마, 김수경(가명)이 그랬다. 두 아이의 양육을 혼자 책임지며 생계 압박에 시달렸으나 거세된 모성으로 달아나지 않기 위해 버텼다. 반듯한 아이로 키우고자 매사 엄격히 통제하고 북돋우고 기도하는 전능한 모성에 도전했다. 그리고 1년 전, 그 사건 이후 이상적 모성은 분열했다. 복수와 은폐의 왜곡된 모성으로 추락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야 했다. 일단은 딸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이제부터 엄마가 너를 보호해줄 거야. 값싼 용서 하지 마라.”

“하나씩 찾아가면서 딸을 위해 엄마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보았어요. 상담소를 찾아가고 변호사를 만나고 자조모임에 정기적으로 나가고 치유 프로그램에도 참석했죠. 오늘 아침에도 유정이가 지난해에 쓴 글을 읽는데 또 눈물이 났지만 많이 희미해졌더라고요. 쓰지 않았으면 응어리로 남았겠죠. 지금의 나를 봤더니 대견해요. 얼마 전까지 딸이랑 부둥켜안고 울고 그랬는데. 유정이도 지금은 친구랑 문자를 주고받고 아이돌그룹 ‘엑소’도 좋아하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게 너무 대견해요. 이 사건을 묻어두지 않고 기회를 준 게 얼마나 다행인지….”

“엄마, 우린 가족이잖아”

때는 경계의 시간. 잔인한 4월이 가고 푸르른 5월을 맞는 4월의 마지막 밤이었다. 딸아이가 잠든 방에서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렸다. 왠지 모를 불안이 등줄기를 훑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일기장이나 메시지를 몰래 본 적이 없었다. 이건 봐야 할 것 같았다. 손가락 따라 화면이 점점 위로 올라갔다. 사실인가 허구인가. 이 자는 인간인가 짐승인가. 경계의 말들. 그건 아이의 몸을 집요하게 탐하는 어린 늑대의 말이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가슴이 죄어왔다. 메시지 발신자는, 아이의 사촌이었다. 곤히 자는 딸아이를 깨웠다. 엄마가 카톡을 봤어. 그동안 왜 말을 안 했니…. 딸아이는 답했다.

“엄마, 우린 가족이잖아.”

유정이는 가족에 애착이 컸다. 자신이 사촌오빠에게 성폭력을 당한 사실을 말할 경우 친할머니, 친할아버지, 아빠, 사촌 모두와 연결고리가 끊어질까봐 두려웠다고 했다. 아이는 왜 한 해 두 번 만나는 사촌까지 ‘가족’으로 품었을까. 엄마는 알뜰하여 500원짜리 요요 장난감 하나 사주는 것에도 인색했다. 친척이 사주는 티셔츠나 양말 하나조차 아이는 상대적으로 크게 느꼈을 터다. 또 외할머니는 종종 말했다. 엄마 힘드니까 친가에 가서 아빠랑 살라고. 유정이에게 친가는 자신의 삶을 의탁할 수 있는 최후이자 유일한 거처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유정이는 친가에서 환대받지 못했다. 태어났을 때도 ‘아들이면 몰라도 딸인데’라며 너덜너덜한 헌 기저귀와 말간 미역국을 내놓았다. 남아선호 관념이 뿌리 깊은 집안에서 손녀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결국, 사달이 났다. 가부장제 질서의 가장 약자인 손녀의 몸에 은밀한 폭력이 가해졌고 그 신음소리는 어디에도 가닿지 못했다.

엄마가 나섰다. 사건을 알려야 했다. 명절마다 면접교섭권을 주장하며 아이들을 데려갔던 전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가 아이를 데리고 있을 때 발생한 일이다. 그는 외려 노발대발 소리를 질렀다. “둘 다 똑같다. 가만두지 않겠다.” 딸아이까지 싸잡아 탓했다. 전남편은 평소 아이들과 교류가 없었다. 아이들이 아빠가 밥은 먹었는지, 잘 지내는지 걱정스러워 메시지를 보내도 답을 하지 않았다. 명절에만 모습을 드러냈던 건 핏줄에 집착하는 할아버지가 유정이 동생인 손자를 보기 원했기 때문이다. 그 조부에게도 말씀드렸다. 가만히 듣더니 태연스럽게 얼버무렸다. “글쎄다. 나는 금시초문이다.”

가해자 엄마의 반응도 싸늘했다. 일단 아이가 학교에 갔으니 직접 들어보고 얘기하자고 했다. 그 후에 “우리 아이가 그런 일까지는 하지 않았다더라”며 사건을 축소했다. 나는 우리 아이가 착한 거만 바라보고 살았다, 성교육도 어려서부터 시켰다며 아들의 폭력행위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부정했다. 가해자는 일찌감치 휴대전화를 꺼놓았다. 친가 구성원 모두 사건을 외면했고 진실을 알려 하지 않았으며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다.

가해자에게 잘못을 알려줄 의무가 있다

“그 일이 있고 며칠간, 처음엔 내가 잘못을 한 건가? 내 잘못인가? 누가 이 일을 알고 뭐라고 하면 어떡하지? 내가 잘 감당할 수 있나? 내 욕을 하진 않을까? 내 말을 믿어줄까? 다 포기하고 싶다. 아… 죽고 싶다. 내가 지금 죽어도 되는 걸까? 내가 죽으면 이 일은 이제 끝나는 건가? 내가 죽으면 스스로 이 일은 내 잘못입니다 하고 인정하는 게 되는 건데, 난 죄가 없는데. 죽을 각오를 하고 베란다 난간으로 갔다. 밑을 쳐다봤다. 너무 높다. 맘속으로는 죽고 싶지만 용기가 나지 않는다.” -딸, 유정의 글

유정이 나이 열한 살, 4학년 후반에 생긴 일이다. 그즈음 아이의 행동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키 크고 마른 체형이던 아이는 이것저것 마구 먹기 시작했다. 식탐을 부리고 방 안에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정리·정돈을 하지 않았다. 영문을 모르는 엄마는 그저 사춘기인가보다 생각했다. 아이의 성적이 다소 떨어졌지만 사교육을 시키지 못해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이유를 의심할 수 없었다. 2년이 지나고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서도 모녀는 서로 눈치만 살폈다. 엄마는 아이를 살피지 못한 죄책감이 컸다. 유정이는 이불에 방대한 오줌을 두 번이나 쌌다. 수경은 엄마로서 묵묵히 이불을 빨고 방을 치워주었다. 그럴 때면 마개 뽑힌 가슴에서 눈물이 한없이 솟구쳤다.

컴퓨터 앞에 앉았다. 고소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사법기관의 출입이 꺼려졌다. 인권도 보호도 느낄 수 없는 곳을 출입했다간 딸아이를 망칠 것만 같았다. 아동성폭력상담소를 검색했다. 법적 절차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사건 당시 가해자의 나이가 어려서 강한 처벌은 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모든 소송이 그렇듯이 시간과의 싸움이고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 등 기본적인 정보를 알려주었다.

유정이는 사촌의 고소를 반대했다. 자기 때문에 시끄러워지는 게 싫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남동생과 다투면 할머니, 할아버지, 아빠 모두가 남동생을 두둔했다. 둘째아이 특유의 생존법으로 남동생이 잔꾀를 부려 잘못을 누나에게 뒤집어씌우면 그 말을 믿고 어른들은 일방적으로 호통을 쳤다. 이런 상황을 반복적으로 겪고 자라서인지 유정이는 누가 자신을 지적하는 것에 극도로 예민했다. 또한 가해자가 소년원에 들어갔다 나와서 자신을 해코지할까봐 두렵다고 했다.

“아이를 안심시켰죠. 엄마가 널 보호할 거다. 아직은 네가 미성년자라서 결정권이 엄마에게 있고 가해자에게도 잘못을 알게 해줘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사과를 받아야 한다. 그게 또 다른 피해자를 줄이는 방법이라고요.”

가해자는 사건 당시 미성년자여서 형사책임을 면했고 거주지역 가정법원으로 사건이 넘어갔다. 가해자와 가해자 부모와 판사만 있는 곳에서 판결이 내려진다고 했다.

“가해자에 대한 사법처리는 내 딸을 회복시키기 위한 당연한 일이었어요. 소송의 진행은 진행이고 일상은 일상이죠. 소송은 일상에서 감내해야 하는 무수한 일들 중 좀더 버거운 사안일 뿐이었어요. 사법처리를 결정했으면 선택에 후회하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했죠. 어차피 판결은 판사 몫이고.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최선을 다해보고 나면 미련은 없을 테니까요.”

가족주의의 껍질을 깨고 나온 엄마의 낭독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서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산다는 것은 서로를 돌보고 키우는 과정이다. 한 아이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는 일에도 작은 마을이 필요하지 않을까. 사람에겐 사람이 약이다. 곁을 지켜주고 말을 들어주고 편이 되어주는 존재가 반드시 필요한 법. 수경은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어떻게 거기까지 갔을까 싶은데 살려고 하니까 살고자 하는 힘으로 간 것 같다”고 말한다. 엄마는 딸을 데리고 치유워크숍에 참석했다.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모여 각자 자기 경험을 이야기하고 글로 쓰는 프로그램이었다. 유정이는 최연소 참가자였다. 아이를 어르고 달래서 데려갔다. 그래도 아이의 표정은 밝았다. 잘 웃으면 이제 괜찮다고 생각해서 엄마가 안 데려갈 줄 알았다고 했다. 그렇게 꾀를 부리고 눈치를 보고 투정도 부리면서 몸이 그곳에 가 있는 동안, 유정이는 ‘엄마의 낭독’을 듣는다.

“갓 스무 살, 그녀는 여상을 졸업하고 벤처기업에 경리로 입사했다.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연말정산, 법인세 신고로 연이은 야근에 환영식을 미루고 있었는데 관공서의 큰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환영식을 겸한 회식 자리가 마련됐다.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 소주 한 잔을 마셨고 빈속인지라 취기가 확 올라왔다. 매운탕 한 숟가락을 떠서 먹지도 못하고 바로 머리 박고 잠이 들었다. 어쩐 일인지 그날따라 술 한 모금 입에 대지 않던 한 남자 동료는 수경을 집에 데려다준다며 차에 태웠다. 부축당한 기억도 있고 업힌 기억도 있고 짤막짤막 장면이 이어졌다. 허름한 여관 침대에서 바지와 속옷만 벗겨진 채로 두 팔은 머리 위로 저지당한 채 그녀는 성폭력을 당했다. 그 남자는 사랑이었다고 말했다. 신앙생활에 따른 소신을 어기면서 원치 않는 임신과 낙태를 하고 나서 그녀는 마음을 정리했다. 내가 더럽혀진 게 아니라 그가 나를 사랑한다고 했으니 믿자. 결혼하자. 스무 살 그녀는 그렇게 ‘값싼 용서’를 했다.” -엄마, 수경의 글

그녀는, 수경은 고백했다. “유정아, 엄마가 그녀야.” 엄마 역시 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었고 그것이 결혼과 이혼의 기막힌 서사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음을. 다단계에 빠져 수천만원의 빚을 지고 가족도 등진 아빠, 그 아빠가 자식의 양육권과 친권을 자필로 쉽게 포기한 사실을, 스물일곱 살에 준비 없이 이혼녀가 되어 살아간 엄마의 외로운 날들을, 첩의 딸로 태어나 모진 구박을 받고 자란 엄마의 유년 시절까지. 유정이는 가족의 어두운 비밀을, 여자로 사는 비애를 어렴풋이 알아갔다. 값싼 용서를 하지 말라던 엄마의 말은 온 생애를 걸고 하는 너무도 곡진한 당부였다.

“저는 고상 떠는 엄마였어요. 아픈 티 안 내고 강한 척하고 화 한번 안 내는 엄마가 자기 얘기를 터놓으면서 눈물을 흘리니까 아이가 놀랐죠. 엄마한테 그런 아픔이 있는 줄 몰랐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동안 혼자 참고 아닌 척한 행동은 나를 지키는 힘이 아니라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었죠.”

수경은 그간 아이들에게 이혼 사실을 숨겨왔다. 아빠는 일하러 지방에 가 있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아빠가 원망의 대상이 되기보다 그리움의 대상이 되길 바랐다. 이웃이나 지인에게도 이혼 사실을 발설하지 않았다. 엄마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모습이 남들 눈에 어떻게 비칠까 싶어 외식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정상 가족’의 외양을 지키려 했다. 유정이가 상담치료를 마치는 날, 이혼 뒤 처음으로 세 식구가 음식점을 찾았을 정도다. 이혼녀라는 낙인, 세상의 수군거림 같은 스스로 만들어낸 환영에 결박되어 전전긍긍 속을 끓였다. 유정이가 가족 간 단절의 두려움 때문에 피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고 했을 때 가슴이 철렁했다. ‘이 아이, 정말 내 딸 맞구나….’

유정이도 슬슬 글을 썼다. 자신을 믿어주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준 상담 선생님, 변호사 선생님, 무조건 내 편인 엄마, 자조모임 선생님들을 일일이 언급하며 그분들이 믿어주고 아껴준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잘 살아야겠다고, “만약 누가 이 일을 알고 나에게 말을 해도 나는 당당하게 아주 자신 있게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차분한 사유로 써내려간 끝에 기침처럼 터져나온 마지막 두 글자는, 어른들의 감탄을 자아냈으니 바로 이것이었다. ‘살자.’

다 말하고 다 먹이는 불량식품 엄마

말 그대로, 엄마와 딸은 조금씩 살아났다. 소송이 끝나고 상담이 마무리되고 6개월간의 치유워크숍도 마쳤다. 영화치료, 글쓰기치료, 반찬만들기 등 추억을 많이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덮어두었던 과거를 들춰낼 수 있었다. 억눌렸던 온갖 것들이 우글우글 기어나왔다. 삶을 보호하기는커녕 결박해온 정상 가족의 위선과 가족주의의 압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숭배해온 낡은 믿음에서 자연스레 풀려났다. 정작 살면서 한번도 힘이나 지지가 되어준 적이 없었던 혈연관계의 무서운 진실을 확인하자 상실에 대한 막연한 공포도 사라진 것이다. 엄마와 딸은 단절의 두려움 대신 소통의 대화법을 체득했다.

사건 전에는 서로 듣고 싶은 말만 주고받았다. 아이는 엄마를 기쁘게 해주기 위한 노력으로 대화에 임했고, 엄마도 도덕 교과서 같은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서로 치켜세우기 바빴다. 수경은 속상한 일이 있으면 쓰레기봉투를 양손에 들고 나가서 버리고 심호흡을 하면서 화가 누그러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평온한 얼굴로 들어왔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아이들을 대했다.

사건 이후에는 편하게 모든 걸 이야기한다. 성폭력 사건을 둘러싸고도 가해자, 가해자 부모, 친조부모, 아버지의 태도가 어떠했는지 있는 그대로 알려주었다. 그랬더니 아이도 자신의 감정, 생각나는 일, 느끼는 기분을 다 터놓았다. 여전히 소리 내서 ‘엉엉’ 울 줄은 모른다.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흘릴 뿐이다. 그건 엄마가 우는 법이기도 하다. 수경의 눈자위가 붉어지고 목소리가 떨릴 때면 유정은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얼른 팔을 벌려 안아주고 다독이며 달랜다. “엄마 또 울어?”

수경은 좋은 엄마가 꿈이고 낙이었다. 스물아홉 살에 교통사고로 인한 수술과, 연이은 세 번의 교통사고로 몸이 불편해 8시간 정규직으로 일하지 못하지만 집에서 하는 조그만 사업으로 스스로 아이들을 책임진다는 자기만족이 컸다. 풍족한 환경은 아니나 아이를 끝까지 놓지 않고 책임지는 엄마가 되려 했다. 라면이나 햄버거 같은 인스턴트 음식은 절대 먹이지 않고 삼시세끼 모두 집에서 챙겨주었다. 잘 먹는 것도 예쁘고 살아 있는 것도 감사했다. 임신해서 지금까지 아이에게 존댓말을 쓸 정도다.

지금은 불량식품 엄마다. 좋은 엄마의 기준을 완화했다. 아이들에게 라면을 먹이고 입에 착착 달라붙는 바삭한 치킨도 사 먹인다. 영화 보고 돈 들지 않는 산책이라도 하려고 함께 집 밖을 나선다. 의례적인 칭찬이 아니라 시시콜콜 지적질도 잘한다.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먹고사는 일에 치여 아이들 표정을 제대로 봐주지 않았던 것을 후회한다. 편히 양껏 얘기할 수 있는 엄마는 아니었음을 인정하고 아이에게도 사과했다. 긴 치유의 여정을 일단락지은 유정이도 홀가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겪은 일이 아주 큰 일 같기도 하고 아무 일도 아닌 것 같기도 하다고.

“유정이가 ‘살자’라는 글을 썼을 때, 우리 딸이 죽음을 생각했다는 글을 보고 좌절했어요. 왜 죽고 싶은 생각이 없었겠어요. 늦게라도 드러나서 다행이죠. 내 딸, 내 일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여기저기 주저리주저리 얘기하기보다 안전한 곳에서 얘기하는 게 중요한 거 같아요. 아이가 피해를 입었을 때 ‘정확히 도움받을 수 있는 전문기관’이 있으니까 찾아가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아이와 시간을 많이 보내고 이것저것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는 게,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데 큰 에너지가 되었어요.”

생활공동체 반려가족의 탄생

올해 초 수경의 가족은 다른 가족과 ‘전격 합체’ 했다. 일전에 가입한 인터넷 카페 ‘한부모가정동호회’에서 만난 인연이다. 꾸준히 재혼을 염두에 두었지만 여건이 허락지 않았다. 사람을 만날 기회 자체가 없었다. 일은 집에서 했고, 작은 개척교회를 다녔지만 교인은 네 가정뿐이었다. 혹시나 싶어 동호회에 가입했지만 활동할 자신도 없고 조건도 안 되었다. 그러곤 딸아이의 사건이 생겼으니 더욱 경황이 없었다. 봄에서 여름으로 한창 힘든 시기를 보낼 무렵 공지가 떴다. 동호회에서 같이 워터파크에 가기로 했다. 유정이 기분 전환도 시켜줄 겸 나들이를 갔다. 그의 아이들과 수경의 아이들이 비슷한 또래였다. 네 명이 곧잘 어울려 몰려다녔다. 그날 친해진 이후 우리 같이 살자고, 엄마·아빠라고 해보라고 애들이 시키는 바람에 두 사람의 관계가 진지해졌다.

“나란 사람의 에너지는 저와 아이들 둘뿐이었어요. 한계가 딱 거기까지였죠. 아이들이 아빠랑 합쳐서 살면 안 되느냐고 요구할 때도 그렇게 말했죠. 엄마는 너희 둘은 책임질 수 있는데 아빠까진 여력이 없다고. 지금은 누구를 끌어안을 힘이 되더라고요. 새 가정을 꾸렸죠. 물론 꾸준히 의심도 해요. 왜 나랑 결혼했지? 보모가 필요한가? 섹스 파트너가 필요한가? 남편한테 계속 물어보고 의심하고 확인하죠. (웃음)”

혈연 중심의 성별 분업을 토대로 한 가족주의의 위계와 억압, 온갖 갈등과 폭력이 있어도 유지되는 가족이 문제이지 가족 자체가 배척의 대상일 리 없다. 더 행복해지기 위해 결혼을 하고, 그리고 그 희망이 몹시도 위험하지만, 산다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는 것. 위험의 파도를 피하지 않고 타고 넘을 힘이 조금은 생겼기에 수경은 새 반려자를 맞이했다. 물론 현실은 늘 상상을 초과한다.

“내가 남편한테 맨날 책 낼 거라고 말해요. 제목은 ‘사별남과 결혼하지 마라’, 하하. 그럼 남편은 실명만 쓰지 말라고 그래요.”

어쩌면 정말로 책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수경은 새 가정을 꾸린 뒤 살면서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그 상황을 글로 써서 남편한테 보낸다.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지만 수경의 입장을 이해하는 답이 온다. 서로 감정이 누그러진다. 일상적인 일로 또다시 싸우더라도 “털어내는 게 중요하다”. 그런 수경을 보고 남편은 말한다. 좋은 스트레스 해소법이 있는 당신이 부럽다고. 수경은 으쓱하여 말한다. 글 쓰는 게 여러 사람 살린다고.

딸에 대한 사랑으로 몸부림친 시간이, 수경을 삶의 다른 자리에 데려다놓았다. 엄마가 딸을 돌보겠다고 나섰지만 어느 순간 딸이 엄마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전능한 모성이길 중지하고 나누는 모성으로 살아가자 수경도 유정도 다른 표정, 다른 관계가 만들어졌다. 이것이 모성의 힘이라면, 아마 이상적 모성이란 약한 것들끼리의 돌봄 연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