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쓰기의 최전선

한 사람을 안다는 것

무슨 여고생 삼총사처럼 붙어다니는 친구들. 셋이서 서로 챙기고 장난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웃음이 그려졌다. 수업시간 마다 간식이 한 보따리 펼쳐져 있어 테이블이 비좁을 정도였다. 온통 먹고 온통 웃고. 그러면서도 수업이 시작되면 노트하느라 볼펜 굴러가는 소리만 들린다. 그녀들은 대학 때 학보사 친구들이다. 우연한 기회에 반찬봉사를 시작하게 됐고 6년의 세월이 흘렀다. 독거어르신 인터뷰집 원고 최종본을 갖고 나와 만나기로 한 이틀 전, 그녀들은 합숙을 한 모양이다. 셋이 같이 있다면서 전화가 왔다. 수화기 건너로 웃음이 굴러가고 '선생님 힘들어요' 잉잉 우는 척하고, 아무튼 왁자했다. 2박 3일 원고를 밤 새가며 읽고 쓰고 고쳤는데,  "글이 너무 안 써져서 울었어요" 한다. 무슨 말인가 했다. 아무리 글이 안 써져도 답답할 수는 있어도 눈물이 나지는 않을 텐데 싶었다.

사연은 이랬다. 글을 쓰는 일은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으로 번역하는 작업이다. 어떤 글이라도 초고는 헐겁고 엉성하다. 이를 테면 좋았다. 기뻤다. 행복했다. 불쌍했다. 이런 설명의 나열만 있다. 그것을 하나하나 보여주어야 한다. 정보적 측면 정서적 측면으로 결을 나누고 생각과 느낌을 구체화 시키고 논리적 인과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집요하게 파고들어야 한다. 한 사람의 삶 속으로. 경험과 사건 속으로. 눈빛 속으로. 한숨 속으로. 더. 더. 더. 이게 괴롭다. 타인의 삶의 심연에 근접하려는 노력 끝에 보게 되는 건, 얄궂게도 자기 자신이다. 내 안에 타인의 존재를 들여놓는 일은 자기 깊이와 넓이의 한계를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예기치 못한 당황스러움을 느낀다.

또 어떤 관계와의 기억의 복원, 사건의 복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한 사람과 오랜 시간 인연을 대고 있어도 생각보다 그의 존재를 잘 모른다. 늘 보던 것만 보니까. 관성으로 만나니까 모른다. 그렇게, 자신의 얼굴, 자신의 무능을 확인하는 시간은 언제나 슬픔을 초래한다. 한 친구는 그런 심정을 후기에 이렇게 썼다.

'할머니의 인생을 들여다보았고, 그 인생을 내 손가락을 통해 옮겨놓았다. 그런 과정 속에서 진정 내가 그럴 자격이 있느냐는 물음과 수없이 싸워야했다. 할머니께서 당신의 인생이 세상에 나오는 것에 괴로워하지는 않을 지, 당신도 잊고 지냈던 기억을 다시 꺼내는 것이 아프지는 않을 지. 나는 그런 것이 두려웠다.

반찬팀 활동 6년 차. 그간 어르신들의 가난과 고통을 보아야했다. 가끔은 어르신들의 삶에서 내 과거의 어느 부분이 떠오르기도했다. 그렇게 투영되는 나의 어린 시절 기억을 나에게 감춰야했다. 행여 나의 가난이나 어둠을 남이 알아채 나를 '안됐다'여기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보다 스스로를 연민하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인지 할머니도 역시 스스로를 연민의 울타리에 가두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 가장 큰 걱정이었다.

인터뷰 하기에 앞서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어르신들의 소소한 일상을 조명하자는 이 책의 편집 의도를 쉴 새 없이 되새기며, 우선 연민을 배제해야 했다. 나는 나의 가장 어린시절 기억을 꺼내 당시의 가난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담담하게 또 담담하게. 나를 먼저 고백하는 것. 그것이 할머니의 인생을 들추는 것에 대한 나의 미안함의 표시였다. 그리고 할머니의 입을 통해 들은 것. 눈을 통해 본 것들을 있는 그대로 적어나가기로 했다.

신기했다. 글을 쓰는 시간들이 고통스럽지만 설레었고, 되새겨지는 기억 속 시간들이 서러워서 꺽꺽 눈물이 나는데도 슬프지 않았다. 할머니의 인생을 엿보았는데 나의 가난이 위로 받았다. 그리고 나는 나를 이해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인생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온전히 나를 먼저 열어야 이루어질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친구는 어르신 인터뷰 글도 잘 썼지만 이 후기를 보니 울컥했다. 마음이 좋았다. 한 사람을 이해하는 일, 기록하는 일은 어떤 완성된 결과물이면서 동시에 미완의 결과물이어야 한다. 글을 쓰면서 '윤리적인 물음'에 봉착하고 몸부림의 시간을 보내는 게 글을 쓰는 일의 가치로움이라면, 이번 작업은 얼마쯤은 성공이다.

 

101세 어르신을 인터뷰한 친구의 고민. 어떤 할머니가 101세다. 얼굴은 애기같다. 하루 종일 말씀이 없으시다. 한번 잠이 들면 24시간도 주무신다. 잠에 침몰된다. 깨어 있을 때는 여러가지 섞인 콩을 나누거나 엉킨 실을 푸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다. TV와 현실을 잘 구분하지 못해 TV에 남자가 나오면 뒤돌아서 옷을 갈아입는다. 치매는 아니다. 할머니가 워낙 말씀이 없고 관계가 없으니 사건도 없다. 이 할머니의 인터뷰를 맡은 친구는, "쓸 게 없어요" 난감함을 표하고 할머니의 단조로운 삶을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 고민했다. 나는 그걸 쓰라고 했다. 도무지 쓸 게 없는 할머니의 삶. 적막으로만 흘러가는 생, 어떤 교환가치도 갖지 못하는 삶, 그래서 화폐화되지 않는 삶, 그 자체를 보여주라고 했다.

그것은 백한살 할머니의 이야기 만은 아닐 것이다. 중증장애인. 노숙자. 은둔자 등 사회에서 자리와 이름을 얻지 못한 자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도 될 수 있다. 자본주의 토대하에서 맹렬하게 살아갈 것을 강요 당하는 이 세상에서 자의타의로 '일'손을 놓아버린, 혹은 그럴 수밖에 없는 삶, 그래서 아무 것도 생산하지 않는(것으로 보이는) 삶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삶의 쓸모와 무쓸모는 누가 어떤 기준으로 결정하는가. 그건 나에게도 중요한 물음이다. 그 친구는 할머니의 적막을 경험하기 위해 할머니와 하루를 동침했고, 글을 썼다. 잠자는 공주같은 할머니는 역시나 말이 없으셨는데 나중에 그 친구가 누울 이불을 펴주면서 두께를 만져보더란다. 춥지는 않을 지 걱정이 되셨던 거다. 한 존재를 염려하는 손길을 가진 할머니. 반은 웃게 하고 반은 울게 하는 매력적인 사람. 하마터면 놓쳐버렸을 할머니의 모습이 한 장면 더해졌다. 

수업하는 동안, 어떻게 써야해요, 물어오면 나도 가슴이 철렁했다. 자신이 없기도 했다. 우리사회에서 독거어르신에 대해 내려진 선판단, 헐벗고 남루하고 고달프고 지루하고 무료한 생. 동정과 연민의 시선으로 지어내는 이야기들만은 반복하지 말자는 얘기를 했다. 내밀하고 은밀한 시선으로만 보이는 그 무언가를 써야지, 대의적이고 도덕적인 덕목을 주장하기 위해 그들의 삶을 소재로 갖다 쓰는 것은 나쁜 짓이니 그러지 말자고 했다. 그리고 이걸까 저걸까 갈팡질팡 고민하면서 우리는 배웠다. 한 사람을 안다는 것, 그들의 삶을 쓴다는 것, 그 조심스움에 대하여. 글쓰기, 그 아름답고 불가능한 놀이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