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쓰기의 최전선

글쓰기의 최전선_ 보고서

 

20113<글쓰기의 최전선> 1기를 시작했고 현재 5기 과정을 진행 중이다. 연구실 외에 고양여성민우회생협생기랑마음달풀’ ‘도봉여성센터등에서 글쓰기 수업을 진행했다. 매 강좌마다 10~20여 명의 학인들과 책을 읽고 글을 써서 함께 읽으며 말을 나누었다. 나는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이전의 나와 달라졌다. 마치 아이를 낳고 다른 존재가 되었듯이, 몸만 알아채는 변화가 있고, 구체적으로는 읽는 책이 달라졌고, 만나는 사람이 달라졌고, 살면서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달라졌다. 한 가지씩 써보려 한다.

1) 어떤 사람들이 오는가

- 오전수업: 주로는 30~50대 전업 주부들이다. 강사, 사업가, 활동가가 있다. 아이 하나 둘 키우면서 육아문제로 고민한다. 결혼 전 일기라도 썼던 사람들, 학생운동에 투신했던 사람들, 문학이나 미학 등 전공자. 경제적인 토대는 안정적이나 가족제도에서 자기 영혼이 기를 펴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한탄과, 자아가 실현되는 삶에 대한 동경을 안고 산다.

- 낮수업: (연구실 수업) 대학생, 취업준비생, 취업포기생, 소설가/ 동화작가/ 문학평론가 지망생, 언론사 기자, 휴직 교사, 판사, 공무원, 영화연출스탭, 대학원생, 여성운동가, 주부, 백수, 회사원, 탈학교 학생, 방송작가, 사진공부 하는 사람.

- 저녁수업: 직장인, 활동가, 백수, 대학생, 주부

2) 어떤 욕망이 있는가

글을 잘 쓰고 싶어 한다. 글쓰기라는 자기표현 욕구는 마치 세계공용어 영어에 대한 갈망과 유사하다. 영어를 잘하면 좋은 점이 많다. 어디서나 인정받고 폼 나고 편하고, 풍부한 삶이 보장된다. 글쓰기도 그렇다. 사람들은 글쓰기를 유창하게 구사하기를 원했다. 논문을 좀 더 잘 쓰고 싶고, 보고서를 잘 쓰고 싶고, 아이들 선생님에게 메모 한 장을 보내도 멋지게 쓰고 싶고, 궁극적으로는 책을 한권 내고 싶어 한다. 글쓰기는 언어를 지배하는 일이다. 언어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감을 구체화하고 힘감정을 느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글쓰기를 배우러 올 때의 마음가짐이, 더 높아지기 위함이지 더 낮아지기 위함은 아니다.

3) 어떤 글을 써 오는가

4기 기준. <전태일 평전>을 읽고 20청춘의 이야기를 써온다. 문태준의 <가재미>는 내 생의 잊지 못할 인연을 떠올리고,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고 본문을 압축하면서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정의해본다. 절망의 골수분자 최승자의 <이 시대의 사랑>을 읽고 소수성, 벤야민의 <일방통행로>를 읽고 사물이야기, 이성복의 <남해금산>에서 치욕의 기억을, <김예슬 선언>의 틀을 빌어 나의 선언을 작성한다. 마지막으로 관심 있는 사람을 인터뷰하면서 또 다른 나를 만나러 세상으로 펜을 향한다.

글쓰기 내용은 혼자만 끙끙 알던 것이다. ‘행복하세요’ ‘부자되세요의 구호에 눌려 세상 빛을 보지 못한 사건들, 자기가 생각한 자신의 비정상성들, 내밀한 부분을 들춰서 쓴다. “태어나서 처음 하는 얘기라며 글로 써오는 경우가 많다. 왕따, 성추행, 가정폭력, 실연, 당사자 혹은 부모의 이혼, 소중한 이의 죽음, 자식과의 불화, 드러나지 않는 질병 등 크고 작은 고통과 수모의 경험을 다룬다. 일명 억압된 것의 귀환이다.

4) 어떤 변화가 있는가

글을 쓰고 나면 후련해 한다. 안색이 밝아지고, 공부를 더 하고 싶어 한다. 글쓰기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는 경우도 있다. 1기 사람들 주축으로 문학세미나가 출범하기도 했다. 한 친구는 10주 동안 썼던 글을 보충하고 다듬고 추가 원고를 작성하여 30세를 기념하는 책을 엮는다고 나에게 축하의 글을 부탁했다. 한 학인의 고백. “첫 수업 시간 각자의 소개를 듣고 멍~했었어요. 다양성 보다는 일관성을 좋아하는 제가 10주를 무사히 버틸 수 있을까 하고요..ㅋㅋ 그런데 10주가 10배속으로 흐르더군요. 수업시간 내내 정말 행복했었습니다..”(후기) “글쓰기 수업 들으면서 내가 얼마나 편협한 생각에 갇혀 있는지 알았어요.” 등등. 내 입으로 말하기 쑥스럽지만 학인들의 수업만족도는 높다. 그 이유는 말을 들어주고 말을 만들어가는 관계가 갖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말하고 싶어 한다. 자기언어가 부재한 상황에서 말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디를 가나 그렇고 그런 시시콜콜 잡담 수준의 이야기를 나눠도 채워지지 않은 공허함을, 글쓰기라는 고된 노동으로 채우고 그러면서 자기 언어를 발명 쾌감을 느끼는 게 아닐까.

5) 어떤 어려움이 있는가

<한겨레>신문 안수찬 기자는 글쓰기는 자아 노출의 공포와 열망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일이라고 했다. 글쓰기 수업하면서 절감했다. 특히 40~50대 주부들의 경우가 어렵다. 자기를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가 아닌 존재 그대로 내보인 경우가 없어서 자기(의 누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직면하고 서술하고 타인에게 내놓는 일을 한없이 어색해 한다. 남에게 나를 이야기하는 데 필요한 낯을 갖지 못한 사람들, 글 낯가림이 심하다. “오늘도 수업에 나올까 말까 고민하다가 왔어요는 기본이고 글을 써놓고 게시판에 올렸다 지웠다를 반복한다. 그러면서도 뭔가 묘한 열정이 이는 걸 느껴요.” “글 쓰면서 밤을 새본 게 20년 만이에요.” “피곤하고 스트레스 쌓이는데 기분이 좋아요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동안 글을 안 쓰고도 살았기 때문에 글쓰기라는 귀찮은 짓을 습관적으로 피하지만, 일단 쓰기 시작하면 그 쾌감에 끌려 본능적으로 잡는다. 글쓰기는 진실과의 대면이다. 자기가 고통을 뻥튀기 해왔음을 알기도 하고, 자기의 게으름을 적나라하게 보기도 한다. 자아의 단단한 벽을 직시하는 일에 단련이 되기까지가 고비다.

6) 왜 자기이야기를 써야하는가

자기 이야기를 쓰라고 하면 생의 곡절을 간증하는 시간으로 오해한다. 그건 아니다. 수업시간에 내가 글감이 자기에게 있다고 강조하는 뜻은 자기 안에 타자를 발견하라는 뜻이다. 근데 대부분 서툴다. 학창시절 글짓기 할 때는 자기가 보고 듣고 느낀 게 아니라 나무, , 가을에 대해서 쓰라고 한다. 평소 관찰한 적도 없고 관계 맺지도 않은 그것들에 대해서 무얼 쓸 수 있을까. 그렇게 감상적이고 알맹이 없는 글들로 언어를 치장하는 글쓰기를 시작하다보니 사람들은 자기감정에 집중하는 법을 모른다. 자기에게 중심을 두는 태도를 배우지 못했고, 오직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만 신경 쓴다. 그걸 벗어나는 의미로서 자기에게 집중하는 시간, 자기를 위한 글쓰기가 필요한 거다. ‘첫 번째 판단을 버려라, 그것은 시대가 너를 통해 판단한 것이다.’라는 니체의 말을 들려준다. 롤랑바르트의 글쓰기도 좋은 모범이다. 바르트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면 그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쓰는 게 아니라 내가 그걸 왜 좋아하는지 자기 욕망과 감정에 고도로 집중했다. 글은 자기로부터 나온다. 글이 안 써질 때는 어떻게 이겨내느냐는 물음에 이성복 시인은 이렇게 답했다.

글을 못 쓸 때는 글을 못 쓴다는 것을 글로 쓰면 글이 돼. 글을 쓰기 위해 딴 짓을 찾으면 글을 못 써...시는 왜 시가 안 되는가를 얘기하면 시가 되지만 시인 것을 찾으려면 백발백중 딴 거라. 단적인 예가 김수영이지.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서 나는 늘 왜 이 모양인가 하잖아. 그래도 시가 되잖아. ‘도 그렇잖아. 시는 누구 때문에 쓰나. 나 자신 때문에 써. 그걸 늘 명심해.’

7) 치유불가능성의 글쓰기

글쓰기의 최전선이 치유하는 글쓰기 아니냐는 말을 듣는데, 사실 난 당황스럽다. 치유라는 말은 이 지옥 같은 세상에 눈감게 하는 단어라고 생각해서 가급적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웰빙이 그랬던 것처럼 치유와 힐링이 상품화되는 세상은 그만큼 대다수가 불행하고 불안하다는 증거다. 나로서는 사는 동안 고통 없기는 힘들고, 어디가 아픈지만 정확히 알아도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치유보다는 치유불가능성을 알아가는 것(으로서의 글쓰기)에 관심이 많다. 치유글쓰기가 아니라 사유글쓰기. 이성복 시인의 말을 빌자면 비를 안 맞으려면 간단하다. 오두막으로 들어가면 된다. 그러나 비를 안 오게 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글쓰기는 고통박멸이 아니라 오두막 짓기에 가깝다. 여럿이 모여서 힘 합쳐 나무패고 땀 흘리고 수박 나눠 먹고 그러면서 시간 보내기다. 남의 얘기도 듣고 공감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환상 때문에 오는 괴로움은 줄일 수 있다고 믿는다.

8) 온갖 일 겪고 나니 너에게 미안해

글쓰기 수업에 다양한 연령층이 모인다. 20대 청년의 글을 통해 50대 여성은 아들의 깊은 고민을 이해한다. 육아의 괴로움을 터놓는 주부의 글을 접한 여학생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엄마도 나를 이렇게 키웠겠구나 생각해요.” 25세 남자 대학생에게 그리 유쾌할 것 없는 나이든 사람들의 글이 지겹지 않느냐고 물으니 말했다. “우리엄마가 할머니 때문에 고생한 거는 이해할 수 있잖아요.” 남자는 여자를 아이는 어른을, 다른 각도 다른 경험을 통해 접한다. 그렇게 다양한 층위에서 삶을 경험하고 나면 조금 타인에게 관대해지고 자기의 번뇌는 줄어든다. 4기 수업의 슬로건이 되었던 문장 온갖 일 겪고 나니 너에게 고마워는 글쓰기 수업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나타내어 아예 문집 제목으로 삼았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하는 존재라면, 그 배움은 자기편견을 극복할 수 있기 위함이어야 하고, 그러한 자기성찰의 (저비용 고효율) 지속가능한 수단이 바로 글쓰기다.

9) 어떤 느낌

남의 글을 읽고 평한다는 것은 남의 삶에 관여하는 일이다. ‘아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다. 그래서 글쓰기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진이 빠지고 힘들었다. 끝나면 어쩌자고 슬펐다. 일일이 읽고 코멘트 달아주고 고쳐주고. 눈 아프고 팔 쑤셨다. 그래도 누군가 한 명이라도 자기 글의 열렬 독자가 되어줄 때라야 글을 쓰게 되니, 글을 쓰게 하는 자로서 나의 역할은 써온 글을 꼼꼼히 읽고 공감하는 일이 시작이자 전부였다. 삶이 엮이고 관계가 끈끈해지고. 글쓰기 수업 이후 나의 술친구는 거의 글쓰기 동료들이 됐다. 그리고 나는 진리라는 보편적인 개념을 탐구하는 철학책을 읽는 대신 개별자를 통해 입장의 진실을 말하는 문학에 빠져들었다. 요즘은 소설과 시만 읽는다. 잘 읽힌다. 문학을 읽을수록 글쓰기가 자기언어를 찾는 일이라는 생각이 절박해졌고 더 자기언어가 필요한 사람들과 글쓰기를 나누고 싶었다. 노동-르포 글쓰기는 그런 시도로 이뤄졌다.

나도 수유너머에서 공부를 시작했지만 수유너머는 전혀 불온하지 않다. 외려 중산층 대상 인문학장사를 하는 측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연구실이 분화되고 내가 현재 있는 수유너머R에도 예전보다는 덜 하지만 문화적 자본과 시간과 열정을 간직한 이들이 많이 온다. (먹고 살기 빠듯한 사람은 자기공부에 돈과 시간을 쓰기 어렵다.) 어떤 대화도 잘 통하고 세련된 감수성과 비슷한 상식을 가진 그들과 노는 일은 꽤나 유의미하고 재미지다. 그런데 동류와 어울리는 즐거움에 빠지면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것이고 대안도 없다. 어디까지나 느낌 층위인데, 나는 직감에 의존한 삶을 살아왔기에 느낌에 복종한다. 지금은 더 낯선 사람, 더 절실한 사람과 글 쓰고 싶다는 간절함이 스물스물 일어난다. 높아지기 위해 온 사람들과 더 내려가고 싶다. 삶의 최전선으로.

* 연구실에서 동료들에게 발표하기 위해 쓴 글. 긴 메모 성격이라 더 써보려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