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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네거리에서 / 김사인

 

 

그럴까

그래 그럴지도 몰라

손 뻗쳐도 뻗쳐도

와닿는 것은 허전한 바람, 한 줌 바람

그래도 팔 벌리고 애끓어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살 닳는 안타까움인지도 몰라

 

몰라 아무것도 아닌지도

돌아가 어둠 속

혼자 더듬어 마시는 찬물 한 모금인지도 몰라

깨지 못하는, 그러나 깰 수밖에 없는 한 자리 허망한 꿈인지도 몰라

무심히 떨어지는 갈잎 하나인지도 몰라

 

그러나 또 무엇일까

고래 돌려도 솟구쳐올는 울음 같은 이것

끝내 몸부림으로 나를 달려가게 하는 이것

약속도 무엇도 아닌 허망한 기약에 기대어

칼바람 속에 나를 서게 하는 이것

무엇일까

 

- 김사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

 

 

홍은동 사거리 종로찐빵을 찾는다. 홍제역1번 출구에서 나가서 직진. 어딘가 익숙하다. 내가 학교 다니던 동네에서 한 정거장 넘어오면 이곳이었다. 집과 반대방향이어서 3.8선처럼 도무지 넘지 않았던 그길. 아직 동네맛이 살아있어 거리가 아침부터 분주하다. 쑥떡을 펼쳐놓고 행상을 차리는 아주머니 손놀림이 바쁘고, 윈도우를 닦는 여성의 팔둑이 힘차게 오르내린다. 작은 신호등을 건너서 우회전. 주인분 말대로 "70년대풍 간판"이 보인다. 너무도 정직한 고딕체. 종로찐빵. 취재차 왔다고 책을 드렸다. 모그룹 계열사 매거진이라고 했더니 만두속을 넣으며 말씀을 잇는다. 그래도 그 기업이 사람들간의 도리와 의리가 살아있다고, 반면에 모그룹은 형제들끼리 권력다툼이 심하고 노동자들이 백혈병 걸려도 외면할만큼 부패했다고 하셨다. "핸드폰도 그회사 제품은 나는 안 써요." 일침을 박는다. 초면인데 나는 조용히 동의했다. "저도 불매하는데..."

 

김이 서린 창문 밖으로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주인분이 흘긋 눈길을 맞추고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한 동네에서 오래 해서 웬만하면 다 아는 사이라고 하신다. 22년된 가게. 4대 주인이다. "옆에 힐튼호텔 직원들도 우리 만두가 맛있다고 와서 사가요. 음식은 손맛이 아니라 재료죠." 자부심이 묻어난다. 고기만두는 국산 돼지고기 목살을 사용하고 최고의 신선한 야채로 만든단다. 찐빵에 팥도 듬뿍 들었다. 피가 두껍지 않고 얇아서 보랏빛 팥이 은은히 비친다. "보일락말락. 참 예쁘네요." 금선선배가 카메라를 셔터를 누르면서 말한다. "꼭 보석같다" 네살바기 빨간 잠바를 입은 아이손을 잡은 젊은 엄마가 들어온다. 등뒤에 아이가 한명 더 매달려 있다. 한 아이 걸리고 한 아이 업고 찐빵을 사러 온 엄마. 동화책에서 본 장면같다. 어부바한 아기 반갑다. 동굴속 고양이처럼 까만 눈만 보이는 생명체. 나는 아기 업는걸 좋아해서 포대기를 오래 썼다. 등에 숨덩어리가 붙어서 뜨겁게 새근거리면 그게 귀찮고 가엾고 그랬다. 지나오면 다시는 들어가지 못할 풍경.

 

찐빵과 만두를 배불리 먹었더니 속이 느끼했다. 커피한잔 마시러 갔다. 대로변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카페베네. 조폭같다. 저 커피도 맛없는 데를 가기는 싫다. 대안이 없는가 머뭇거리다가 금선선배가 좋은 집 안다며 골목으로 데려갔다. 찐빵골목에 핸드드립 커피집이다. sooda154. 책과 음반이 있는 작은 가게. "진하게 내려주세요." 커피를 준비하는 주인의 손이 느리고 정교하다. 여과지가 헝겊이다. "융드립 하시나봐요" 물었더니 주인이 "드립커피 좋아하시나봐요." 화답한다. 커피로 내통하는 사이. 마음이 통하는 웃음. 음악도 좋고. 향기도 좋고. 소리도 좋고. 시골밤하늘 색깔같은 커피를 마주하니 가슴이 설렜다. "모닝 커피 맛있게 마시면 하루가 행복하지 않니?" 금선샌배의 말에 고개를 끄덕끄덕. 골목 커피집이라 그런지 한산하다. 따뜻한 고요가 몸까지 들어차다. 시집에 손이 갔다. 김사인. <가만히 좋아하는> 사놓고 읽지 못하다가 어제 주간님이랑 산책하는데 그러셨다. "나는 김사인이 좋아요. 다음 책을 기다리는 몇 안되는 사람이에요." 왜 좋아하시느냐 묻자 "함부로 쓰지 않는 점"이라고 한다. 쉽게 쓰지 않아 책이 몇 권 없는 시인의 겨운 시집. 시간과 기억을 묶어두고 싶어 베껴쓴다.  

 

담배피는 선배 따라 밖에 나갔더니 가게 앞에 칠판에 시가 써있다.  "시 좋아하시나봐요." 주인은 매일 바꾸려는 게 컨셉인데 게을러서 이틀도 간다며 웃으신다. 필사한 노트를 찢어서 드렸다. 다음에는 이 시를 베껴쓰실래요? 좋으시단다. 네거리라서 네거리에서 시를 썼다고 했더니 웃으시며 벽에 붙여놓는다. 자연스럽게 찢은 종이의 우둘투둘한 느낌이 좋다고. 예전에 이런 걸로 편지지도 만들었다고 했다. 왜 카페 이름이 154sooda인지 숫자의 의미를 물었다. 처음에 가게 열고 같은 질문을 하도 자주 받아서 칠판에 써놓았단다. 154의 의미는 주인의 본적지. 태어난 자리를 잊지 않기 위함 정도.  골목에 카페가 있으면 장사가 되는지. 묻지만 말고 팔아주세요. 했단다. 배짱좋게 상가동네 골목에 커피가게를 창업한 이유는 근사하다.  소설제목을 차용하여 '죽음에 관한 한 연구'라고 하셨다. 그 가게가 잘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나왔다. 선배가 말한다. "이 골목 취재해서 글좀 써라. 여기에 없는 가게가 없어. 미용실. 이발소. 병원. 식당. 세탁소. 여기도 재개발로 사라지면 다 떡볶이 체인점 들어오고 이런 가게 없어지잖아." 네거리를 돌아가는 길목. 사라지지 않으면 좋겠는 것들이 아쉬워 자꾸 고개가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