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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오르는말들

길에서 쓰다

* 생의 빈틈이나 존재의 허전함을 사람으로 채우려는 건 무리한 욕심이다. 그래서 음악이 필요하고 책이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 말 없는 그것들이 품은 살같은 말에 기대어 살아가는 나를 본다. 나는 사람과 관계맺는 법, 사람을 사랑하는 법에서 점점 더 멀어져간다. 연연하지 않을 만큼 가까워지기를 희망한다. 그리 사는 영혼이 문득 가여운 거다. 연구실에서 집에 올 때 연대앞에서 버스를 갈아탄다. 버스도착시간 전광판에 15분. 이런 숫자가 새겨져있으면 황당스럽다. 15분을 정류장 의자에 구겨져서 기다릴 때도 있지만 주로 걷는다. 어제도 걸었다. 어둑신한 길을 걸으면서 번잡스러운 생에서 빠져나온다. 안간힘 쓰던 지난 2주의 시간들. 무엇을 연연하는가. 손에서 빠져나갈세라 움켜쥐는가. 그런 집착들이 통째로 무쓸모하게 느껴진다. 걷다가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봤다. 나의 푸념에 대한 답으로 친구에게 온 문자. 이 생에서 지키고 애쓰며 영위해야할 것이 무엇인가..

한동안 조용하던 메시지함에 박힌 생의 물음. 진부한데 곡진하다. 고개들어 바라본 달만큼 선명하다. 나는 이 세상에 나온 이유를 찾고 싶다. 그 생각을 하면 꼭 눈물이 난다. 두 주먹으로 훔쳐내고 세 정거장 지나서, 사나운 형광등 켜진 버스를 탄다. 두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면 미안하다. 학원을 보내야하나 말아야하나, 시험인데 해줘야하나 말아야하나, 저것이 어떻게 밥을 먹고 살까. 힘없는 부모 만나서 너네가 고생한다. 내 비록 입시설명회는 가지 않더라도 365일 중에 단 하루도 고민하지 않은 날이 없다. 월세를 어떻게 내야하는지 걱정스러워서 또 구차하게 여기저기 편집자 친구한테 전화해서 '집에서 할 수 있는 윤문알바 대환영'이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고는 침대에 벌러덩 누워 천정에 붙은 모기시체 파편과 핏자국을 바라본다. 여름한철 맹렬하게 흡혈하다가 사라지는 저것들처럼 한순간에 납작하게 깔리고 싶다. 다족류처럼 여기저기 걸쳐진 인연의 발이 다 끊어지길 나는 때때로 소망한다.

* 지난 토요일, 지하철에서 권혁웅의 <마징가계보학>을 폈다. 시세미나에서 읽을 때 초벌구이를 해놓아서 그런지 한행한행 더 선명하게 와닿았다. 자꾸만 손이 가는 과자 먹으면서 만화책 보듯이 심취해서 읽다가 고개를 드니 시청역을 지나고 있다. 할 수 없이 을지로입구에 내려서 건너가려고 하는데 정장 재킷 입고 '안전요원' 띠를 두른 할아버지가 뒷짐을 지고 계신다. 저, 제가 잘못 내려서 건너가야하는데요, 말씀드렸더니 "젊은 사람이 정신을 어디다 놓고 다니나. 나처럼 늙은이도 아니고.. 파란색 버튼 눌러요. 문 열리니까." 하신다. 흐흠 헛기침 하고 돌아서는 등뒤에다가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모르는 어른한테, 오랜만에 혼나봤다. 내가 바보처럼 잘못 내린 게 선행이라도한 것처럼 뿌듯했다. 하루종일 무료하고 심심했을 할아버지에게 잠시나마 존재의 이유를 제공해드렸으니.

1호선 신이문 역에 가는 길이다. 서울의 동쪽 끝으로 오랜만의 행차다. 묵은 것에서 나는 퀘퀘하고 시큰한 냄새. 깊이 들어갈수록 가난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요즘은 길에서 허리 굽은 어르신들이 안 보이길래 의술이 좋아져서 곱추는 다 고치는 줄 알았는데 이 동네에서 할머니 두 분이나 보았다. 낫놓고 기역자도 모른다고 할 때 그렇게 기역으로 정직하게 구부려진 몸이 내 눈앞에서  걸어갔다. 여기 모여계셨구나. 눈에서 안 보인다고 없는 건 아닌데. 신이문역 굴다리 아래에는 할아버지들이 장기를 두고 있다. 이건 공간여행이 아니라 시간여행이다. 같은 서울인데도 여기는 80년대의 풍경이 고스란하다. 없는 사람은 모여살기라도 해야 덜 쓸쓸하니 다행이지 싶다. 경험과 관계가 엮인 '장소'는 사라지고 편리와 효율만 있는 '공간'만 남는 서울에서 나는 모처럼 장소성을 체험했다. 학교앞 골목길에서 다라이놓고 때이른 김장을 하는 사람들. 독거어르신이랑 동네아이들이 모여서 전을 부치고 활동가친구는 팔둑에 고춧가루를 바르고 환하게 웃는다.글쓰기수업도 시세미나도 여자가 8할이다. "여기 독거어르신도 할머니가 압도적으로 많네요?" "어머님들 덕분에 김장을 쉽게 했어요. 얼마나 힘이 좋고 손이 빠르신지." 나이가 들어도 퇴화할 줄 모르는 억척스러움의 세포를 어쩔 것인가.

* 손에는 사르트르의 '말'을 무슨 부적처럼 꼭 쥐고 버스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앞에 선 사람을 보니 아는 친구다. 글쓰기수업 1기 첫수업 때 30분이나 일찍 온 친구. 마지막 에세이로 할머니 얘기를 써서 나를 울린 친구. 우연한 마주침에 반가워서 가방을 들어주었다. 나는 앉고 그는 서고. 비대칭의 시선을 힐끔거리며 교환했다. 명절에 할머니한테 가겠네? 네. 근데. 할머니가 전화만 하면 "올 거 읎다" 그래요. 안부전화해서 할머니, 무릎이랑 허리는 괜찮으세요? 물어봐도 무조건 대답은 똑같아요. "여기까지 올 것 읎다. 나는 괜찮다." 바쁜 손녀에게 짐이 되기는 싫고 보고는 싶은 이중감정을 저렇게 직설화법으로 표현하시다니. 보고싶다고 말했다가 거절당할까봐 두려운 마음은 나이가 들어도 퇴화하지 않는가보다. 4기 수업에서 한 친구도 전라도까지 내려가서 할머니를 인터뷰해왔는데 마지막 문장이 아직도 기억에 박혀있다. 긴 얘기를 만리장성 들려주시고는 돌아서는 손녀에게, 말씀 하신다. "좌우간 고맙다."  올 것 읎다와 좌우간 고맙다가 돌림노래처럼 공명한다. 종합하면, 올것 없는데 좌우간 고맙다. 쯤 되겠다. 버스토그 중에 선배한테 전화가 왔다. 왜 무슨 고민있어? 아니 아니 없어. 바쁜데 일해. 할 말있는데 좌우간 끊는다. 쯤 되겠다. 나 할머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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