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올드걸의시집

바다 / 백석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은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섦기만 하구려

 

- <정본 백석 시집>, 민음사

 

 

 

방학이 길어지니까 애들이 악마로 보이기 시작한다. 끼니 때마다 고개 쳐들고 웃으면서 나타나는 뿔 달린 악마. 복면한 밥도둑. 칠월말 팔월초 폭염에는 정신이 혼미해서 힘듦을 표현할 수조차 없었다. 힘들 때 힘들다고 말하고, 힘들게 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데도 최소한의 에너지가 필요한가 보다. 며칠 전. 외출했다가 5시30분쯤 귀가했다. 아들은 학원에서 친구랑 저녁 먹는다고 했던 참이다. 집에 가면 좀 쉬었다가 7시쯤 딸이랑 대충 저녁을 먹으려고 했다. 근데 집에 갔더니 아들이 어슬렁어슬렁 방에서 나오더니 약속이 취소됐다며 말한다. "엄마, 저 6시까지 학원 가요."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부엌으로 종종종 오리처럼 걸어가서 가방은 싱크대 앞에 던져두고 후다닥 밥솥을 열어보고 찬밥 남은 거에 안도하고 남은 된장찌개랑 냉장고 뒤져 당근 다져넣고 계란말이를 해서 빛의 속도로 저녁을 대령했다. 그러고 나니, 왜 그렇게 화가나는지. 나의 행동이 왜 그렇게 한심스러운지. 아들은 또 왜 그렇게 얄밉고 얄미운지. 밥때가 됐으면 지가 알아서 밥을 차려먹을 일이지 내가 오기를 기다렸나? 내가 조금만 늦게 왔으면 굶으려고 한건가? 아니면 밥 차려 먹으러 나오는 길인데 엄마를 보니까 말한 건가? 아들의 의도야 어쨌든 괘씸해 죽겠는 거다. 만약 아들한테 엄마 피곤하니까 니가 대충 차려먹으라고 말했으면, 충분히 그랬을 텐데 괜히 내가 알아서 해줘놓고 뒷북이다. 자식들 밥에 목숨 걸고 자동으로 기능하는 내가 한심한데, 그런 나를 미워할 수는 없으니까 원망의 화살을 아들한테 돌리고는, 이 시츄에이션이, 고작 먹고 싸는 일에 에너지를 다 쏟아부어야 하는 삶이 분해서 씩씩거렸다.     

 

역할. 역할의 꽃. 엄마역할. 역시 '역할'은 생각을 요구하지 않는다. 영혼 없이도 가능하다. 현관에서 들어서면 나는 엄마가 되어 기차가 레일을 지나가듯 현관에서 부엌으로 부엌에서 식탁으로 식탁에서 냉장고로 자동왕복하는 거다. 사고하지 않아도 그냥 습관대로 하던대로 막힘없이 수행한다. 이런 걸 무슨 숭고한 모성이라고 말하겠는가. 자기 손에 물 묻히기 싫은 사람들이 지어낸 말일 뿐. 누추하고 번거로운 집안 일이다. 내가 엄마라는 사실이 싫은 건 아니다. 엄마역할로 주어지는 과다한 몫들이 싫다. 엄마역할을 하는 동안은  내가 나같지 않다. 그냥 밥순이 그냥 아줌마다.

 

지난주에는 특별히 휴가계획도 없고 해서 남편이랑 딸아이랑 캐리비언베이를 갔다. 아들은 안 간다고 해서 떼어놓고 셋이 갔다. 삼성왕국에 들어가는 게 영판 못마땅하고 티켓값은 또 얼마나 비싼지 한숨이 푹푹 나왔지만, 그래도 딸을 위한 외출인 만큼 입을 꾹다물고 (불만을 티내지 않고) 가족나들이에 참여했다. 볕이 너무 뜨거워 선캡을 쓰면서도 앞머리를 뒤로 넘기고 대충 눌러썼다. 수영복을 입었지만 늘어난 뱃살이 민망해서 전신거울은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종일 물놀이를 하고는 씻으려고 탈의실을 들어가는 길에 언뜻 거울을 보았는데 완전 깜짝 놀랐다. 앞머리는 파뿌리처럼 지저분하게 헝클어지고 팔뚝과 목덜미는 벌겋게 익은 불타는 고구마같은 웬 심난한 여자가 나를 쳐다보는 거다. 저게 나인가? 인정할 수 없었다. 고개를 저었다. 혹여 따라올세라 등돌렸다. 열쇠번호를 확인하고 옷장을 향해 더듬더듬 발걸음을 옮기는데, 우리 옷장 앞 바닥에는 늘씬한 비키니 차림의 아가씨 두 명이 앉아서 수십여 종류의 화장품을 바자회 좌판마냥 늘어놓고 손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아이라인을 그리고 있었다. 저 정도면 메이크업아티스트 작업대다. 화장이 아니라 특수분장이다. 결혼 때 신부화장 말고는 아이라인을 그려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물놀이 와서까지 꽃단장에 여념없는 비장미 넘치는 그녀들이 신기하고 부러웠다. 저렇게 수고와 열정을 다해 미모를 가꾸고 뭔가 설레는 사건이 발생하기를 기다리는 아가씨들이 한편 귀여웠고, 나는 저런 시기 없이 마흔이 넘어버렸다니 섭섭했다.

 

죽전 휴게소에 들러 저녁을 먹었다. 맞은편에 앉은 딸아이가 안 그래도 식성이 좋은데, 물놀이까지 해서 더 입맛이 꿀맛같을 딸아이가 밥을 너무도 맛있게 쩝쩝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애잔하고 또 미안했다. 아들은 벌써 커서 친구를 더 좋아하니 저 꽃수레가 없었으면 나랑 남편이랑 심심했을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아주 잠깐 들었다. 그래서 말했다. "키우기 힘들어도 낳기를 잘했다." 그랬더니 꽃수레가 고개를 끄덕끄덕 흔들면서 손가락으로 옆자리 아빠를 가리킨다. "맞아. 특히 아빠. 엄마는 오빠라도 있지. 아빠는 친구가 나랑 티비랑 에어컨 뿐이야." 자기는 아빠의 단짝친구라고 맨날 그러는데 스스로 존재의 구실과 이유를 용케도 찾는다. 아이에게는 아직 사는 일이 역할놀이는 아닌 거 같다. 딸이다가 친구이다가 연인이다. 유연하다. 상황에 따라 순발력있게 존재를 바꾸고 관계를 즐긴다. 어쩌면 아이에게도 존재불안이 있어 더 그럴 지도 모르겠다. 부모에게 버림받을 지도 모른다는 원초적 불안. 성인이 되어 자기한몸 챙길 때까지는 이 세상 모든 아동들은 자기유지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겠지... 그러니 안쓰러운 어린 것에게 잘해주어야하고 최선을 다하고싶은데 자주 힘에 부친다. 내심 잔인해진다. 이 분열적인 자아를 바라보아야 하기에 엄마로 사는 일은 쓸쓸하고 서러웁다.

 

백석시를 읽었다.  음식 얘기 사람 얘기 설움 얘기가 이리도 투명하다니 반했다. 앞으로 백석도 '오빠'로 삼아야할까보라고 시세미나 친구에게 문자를 한통 넣었다. '바다'라는 시를 읽다가 청승맞게 공상에 빠져버렸다. 푸른하늘의 <겨울바다>가 생각나서 찾아 들었다. 버스커버스커의 <여수밤바다>가 연상되어 또 여수밤바다를 듣고 흥얼흥얼 따라 불렀다. 정말이지 이럴 때만 좋다. 이럴 때만 사는 것 같다. 나의 영혼이 촛불처럼 환해지고 기타처럼 딩가딩가 자유롭게 춤을 춘다. 가족들이랑 캐리비언베이 가는 거 말고 내가 정말 가고 싶은 데는 여수밤바다다. 혼자서 가고 프다.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여수행 우등고속을 끊고 떠났다가 여수에서 며칠 묵고 또, 백석이 "자다가도 바다가 보러 나가고 싶다"고 한 통영에도 가고. 민박집에서 하루종일 방끝에서 방끝으로 뒹굴며서 책보고 밤이면 파도 소리들으면서 글쓰고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붙박이 인생 청산하고 떠돌이처럼 살면 내가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그럼 사는 일이 덜 지겨울까. 역할에서 빠져나오면 나비처럼 자유로울까. 여섯시간째 뱃속이 텅 비었다고 전화하는 딸내미에게 즉시 달려가지 않아도 되면 나의 인생이 더 고상해질까. 밥에 묶인 삶. 늘 떠남의 욕망에 시달린다. 먼곳에 대한 그리움이 바다되어 출렁이고 마음만은 지중지중 물가를 거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