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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이민하, 뿔을 접었다 폈다

 

얼마 전 고1학생의 자살소식을 들었다. 죽은 시간과 상황이 유독 안쓰럽다. 일요일 아침 7시, 아빠가 아이를 학원에 보내기 위해 깨우려고 방문을 열었더니 창문 끝에 아이가 매달려 있다가 그대로 떨어졌다고 한다. 이는 영화에서나 보던 가슴 조이던 장면이 아닌가. 유리창 문틀에 매달려 있는 아이의 하얗게 질린 열 개의 손톱이 가슴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아이는 얼마나 용을 쓰다가 놓아버렸을까. 눈앞에서 자식을 보내야했던 아빠는 그 잔인한 형벌을 어떻게 감당할까. 관련 기사를 더 찾아보니 집이 경기도 화정 소재 아파트이고 고등학교 진학하면서부터 대치동 국어전문학원을 다녔으며 ‘엄마가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할 거 같다’는 유서가 발견됐다고 한다. 그 기사에는, 일요일에도 늦잠 한번 늘어지게 못 자고 학원에 다녀야했던 아이의 팍팍한 삶을 동정하고 극성부모를 비난하는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뜨끔했다. 실은 나도 전적이 있다. 큰 아이가 고등학교에 배정 받고나니 막연히 불안했다. 동네 엄마들이 시간이 여유로운 고1때 국어를 잡아놓으라고 충고했다. 모처럼 시간을 내서 학원쇼핑을 나갔다. 집 근처 건물 외벽의 간판을 보고 국어학원에 두 군데 들어가 보았다. 주중에는 아이들이 영수 위주로 학원을 다니니까 국어는 주로 주말반이 개설돼 있었다. 상담교사가 일요일 아침9시가 가장 먼저 마감되는 시간이라며 한 자리 남았다고 말했다. 갑자기 조바심이 났다. 다른 아이들이 이토록 열심히 공부한다는 사실에 충격과 자극을 받았다. 나는 그간의 아들의 학업 관리 소홀을 자책하며 이틀 정도 갈대처럼 흔들렸다. 그런데 아들이 원치 않았고 나도 싫었다. 아무리 가까운 데라도 9시까지 학원에 보내려면 그 전에 일어나서 밥을 차려줘야 한다. 일요일 아침마다 누리는 내게 강 같은 평화, 그 빈둥거림을 반납하기 싫었다. 엄마의 불꽃같은 교육열(사실은 ‘우리 아이 어디 보냈다’는 자기의 명예욕)은 한 인간의 수면욕망 앞에서 힘없이 꺼져버렸다. 내가 생리적으로 더 건강했다면 상황이 달랐을 지도 모른다.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가 엄마를 등돌리고 누워 있네.
잔뜩 뿔이 난 아이에게
얘야 자장가를 불러줄게, 엄마는 다가가
어루만진다. 검은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으로
아이의 뿔을 갉으며 뽑으며
피부 속으로 깊숙이 밀어넣으며.
엄마는 계단. 엄마 대신 달을 노래를 기차를 가졌을 때도
만삭인 아이는 엄마 엄마 밟으며
달을 따고 모창을 하고 기차를 유언처럼 후, 날릴 때에도
뿔은 특수분장처럼 피부 속으로 들락달락.
보이는 것은 사라지고 사라진 것은 끝없이 살아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뿔이 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뿔뿔이 헤매면서 사람들은 뿔을 폈다 접었다
뿔뿔이의 놀이.
뿔뿔이의 힘.

- 「뿔뿔이」(<음악처럼 스캔들처럼>)

극성 엄마와 아닌 엄마의 차이, 자살하는 아이와 아닌 아이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 내가 우리 아이를 일요일 아침9시에 국어학원을 안 보냈다고 해서 더 참된 학부모도 아니다. 한 때는 나도 첫 아이를 욕망의 도구로 삼았다. 집안에 갇힌 젊은 엄마가 가장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삶의 돌파구는 ‘자식’이므로 그랬다. 아이가 태어나 열 살까지는 육체와 정신이 눈에 띄게 성장한다. 육아는, 현재 삶의 외형을 크게 바꾸지 않고 짜릿한 변화와 성장을 만끽할 수 있는 즐거운 ‘놀이’였다. 쉼 없이 공급되는 생의 리비도는 자식에게로 흘렀다. 그러다가 나의 일에 몰두하면서 육아놀이에 소홀해졌다. 몸이 고되서 아이를 더 닦달하지 못하고 거리를 두려다가 무신경해진 측면도 크다. 욕망의 뿔은 특수분장처럼 피부속으로 들락달락. ‘뿔뿔이 헤매면서…뿔을 폈다 접었다’를 반복한 것이다. 주변을 보아도 다른 삶의 탈출구가 없는 엄마들은 자식을 자아실현의 장으로 삼는다. 엄마의 체계적 학습관리에 따라 어릴 때부터 줄곧 고된 일정을 소화하는 아이들도 흔하다.고인이 된 그 아이는 아침에 학원만 다녀오면 하루 종일 농구를 했을 지도 모른다. 그 아이는 왜 죽었을까. 삶을 왜 놓아버렸을까. 엄마들의 욕망의 뿔에 상처받고 휘청이기도 했겠지만, 과도한 초과학습노동만이 원인은 아니다.

세상과의 접점이 고작 창틀 끄트머리였던 아이의 삶을 생각한다. 내가 요즘 생각하는 가장 비참한 삶은 ‘비빌 언덕’이 없는 삶이다. 너는 누군가에게 한번이라도 연탄이 되느냐보다 시급하게 물어야할 것은 너는 누군가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주었느냐 같다. 학원을 다니든 아니든 아이든 어른이든 사는 일은 계속 힘들다. 그럴 때 기댈 곳이 필요하다. 기댈 곳이란 내 삶의 외부를 말한다. 나의 학창시절에는 부자 아이 가난한 아이 등 다양한 계급이 섞여 살았다. 간접적으로 타인의 삶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일인분의 갑갑한 삶 너머에 다른 삶의 지평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인지했다. 나의 사촌언니는 고등학생 때 엄마랑 대판 싸우고는 고모인 우리 엄마를 찾아왔다. 김치찌개에 밥 한 그릇 비우고 아랫목에서 우리엄마한테 하소연 하다가 귀가했다. 친한 친구는 시험을 못 봐서 엄마한테 혼나면 할머니랑 잤다고도 했다. 우리 딸내미는 엄마가 없어 쓸쓸하면 아빠한테 전화하고 아빠가 바쁘다고 하면 내 친구에게 전화해서 외로움을 달래곤 했던 모양이다. 나중에 친구가 ‘꽃수레가 맨날 전화한다’는 얘기를 듣고 얼마나 짠하던지. 그나마 아이가 이모라고 부를만한 친구가 있어 다행이고 고마웠다.

빛과 바람과 흙의 힘으로 유기재배되지 못하고 아파트 밀집지역에서 화학비료로 속성 재배되는 아이들. 그 아이들은 외롭고 힘들 때 누굴 찾아갈까. 어디에 등 뉘일까. 집 밖을 나가면 베란다 낭떠러지다. 가족이 많아야 서넛이고 이웃과 왕래가 끊겼다. 친구들은 학원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비현실적인 드라마나 게임 말고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듣고 다른 사람의 삶을 엿보고 느낄 기회가 없다. 자기의 고민과 아픔과 과오를 잠시 덮고 너른 시야를 틔울 비빌 언덕이 없다. 그렇다고 유년시절에 실컷 놀기나 했으면 행복한 과거가 의지처가 될 수도 있으련만 그도 아니다. 딱히 타고난 공부재능이 없고, 파먹을 과거추억이 없고, 기대할 미래희망이 없고, 언제든 괜찮다 괜찮아 등짝 두드려줄 자기편이 없고, 좌충우돌 헤매면서 만들어온 자아의 이상도 없다. 외부 세계와 씨줄날줄로 엮여있는 관계가 없으면 나는 없는 거다. 점 하나로 존재했기에 언제라도 먼지처럼 휘익 사라지는 삶. ‘너무 자라버렸고 지상에서 노는 게 시시’한 삶…어떻게 해야 경험과 추억이라는 질량과 무게를 가진 삶. 놀이와 인연으로 엮인 머리카락 보이는 삶을 회복할까.

어디 갔니 얘야, 엄마는 백 년 전부터 찾고 있지만
소용없어요 다람쥐통에도 끼일 만큼
나는 너무 자라버렸고 지상에서 노는 게 시시해

저길 보아요, 회전목마가 지겨운 사람들은 딱딱한
말을 버리고
외마디 비명을 챙겨 번지점프대로 오르지요

-「가면놀이」부분 (<음악처럼 스캔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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