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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세상

토요일, 걷다 - 쌍차 해고자 복직 걷기대회


오랜만에 걸었다. 정수리 위에다 이글거리는 초여름 해를 지고 강바람 몸에다 걸고 뛰다가 걷다가 흘렀다. 여의도에서 시청까지. 작년 가을 시세미나 시작하고 '토요집회'에 소홀했었다. 아무래도 에너지가 한 곳으로 쏠리면 흐름을 돌리기는 어렵다. 하나의 수도꼭지에 하나의 호수 밖에 들어가지 않듯이 나의 리비도는 '시'에 끼워졌던 것이다. 세미나를 오래해서 여유가 좀 생긴 건지, 아니면 맑스를 읽어서 그런지 집회에 가고픈 충동이 일었다. 재능노조 1500일 투쟁. 쌍차 22명의 죽음. 삼성전자의 멈추지 않는 죽음의 행렬. 내가 공부하는 이유와 내가 공부한다는 이유로 외면했던 현실에 내 몸을 들여놓고 싶었다. 여의도공원 앞 횡단보도에서 초록불이 되기를 기다리는데 낯선 얼굴이 보인다. 김진숙 지도위원이다! 나는 완전 반가워서 입을 귀에 걸고 넙죽 몸을 반으로 접어 인사하고 - 사실은 큰절이나 큰 포옹을 하고싶었다. -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기념사진을 찍었다. 

뭔가 길한 조짐에 살짝 흥분했다. 오길 잘했군 잘했어. 공원 입구에서 mbc 노조분들이 백만인 서명받고 있어서 사인하고. 광장에서 기념수건 사고, 얼음조각전 보고. 박재동화백이 캐리커쳐를 그려주는 것도 구경하고 아는 선배 만나서 기념사진 찍고 놀다가 행진시작.  마포대교 앞에 차벽에 막혀서 그 앞에서 30분 공연보고. 경찰차에서는 계속 안내방송이 나왔다. 집회 때마다 반복되는 징징거림. 여러분은 도로교통법 몇조 몇항을 위반하고 있다고, 그러니 가정의 품으로 돌아가라는 멘트가 흘러나온다. 청소년 대상 선도방송에도 못 써먹을 얘기를 장성한 시민들 대상으로 한다. "우리는 돌아갈 가정이 없다!" 파편적인 외침이 들려온다. 그날 따라 법조문이 유독 듣기 싫었다. 저것은 말이 아니다. 모든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소통을 거부하는 철갑옷의 언어. 모든 말을 튕겨내는 권력언어를 총알 발사하듯 반복적으로 기계적으로 발설한다.   

시위대와 차벽의 대치가 길어져서 행로급변경. 우르르 여의나루역에서 공덕역까지 지하철로 이동하고 공덕역에서 시청까지 다시 대오를 만들어 걸었다. 한 천명쯤 되는 시위인파가 게릴라전처럼 도로에서 지하철로 차도에서 인도로 밀렸다가 뛰다가 걷다가 시청까지 흘러가는 과정이 긴장감 넘치고 흥미진진했다. 오후 5시 무렵 시청 도착. 본행사 준비로 분주한 대한문을 뒤로하고 시세미나 하기 위해 연구실로 들어가서 오은의 <호텔타셀의 돼지들>을 읽었다. '아침이 수수께끼'라는 시구에 대한 곰곰한 대화. 아침에 눈을 뜨면 또 어느 공간에 끼워진다는 사실이 싫었다고 그래서 아침은 자기에게 수수께끼였다고 한 친구가 말했다.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삶의 방식이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함을 토로하는 시간들을 보내고, 세미나 친구들 다섯명과 다시 대한문으로 왔다. 1박2일 난장이라 했거늘, 시위대가 많이 빠져나갔고 빈 돗자리와 빈 생수병이 나뒹굴어 을씨년스러웠으나 무대는 한껏 달궈졌었다.

알짜배기는 그 때부터. 골든브릿지, 유성기업, 재능, 쌍차, 한진 등 사업장 투쟁동지들이 발언과 공연을 선보였다. 요즘은 싸웠다하면 1000일은 기본이다. 재능노조가 벌써 1600일이라고 해서 가슴 쓸어내렸다. 사업장은 달라도 자본가의 악랄하고 치졸한 행태, 억압과 착취를 자행하는 방식은 흡사했다.  맑스의 치밀한 분석글을 읽을 때처럼 소름돋았다. 누군가 무대 앞을 슬그머니 오가며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다가 쪼그려 앉아 경청하다가 그러길래 보니까 김진숙 지도다. 밤에 보니 더 작고 작은 체구의 그녀. 저 몸 어디서 기운이 나와 35미터 벼랑 끝에서 삼백일을 버텼을까 싶으니 또 뭉클했다. 비정규직 철폐 투쟁. 조남호 육실헐놈. 구호와 욕설과 웃음이 난무한다. 신난다. 집회의 저러한 천편일률적인 방식과 배치가 좀 싫었었는데 그날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주먹에는 거짓이 없다. 몸에 들끓는 울분과 원한과 분노는 손끝까지 뻗치니 주먹으로 뭉쳐 우주로 날릴 수밖에 없구나.

지하철 막차를 기다리며. 시세미나에서 대한문 갔다가 같이 귀가하던 스물셋 친구는 정치적 집회가 처음이라고 한다. 약간 멍한 표정이다. 시 읽고 맑스 공부하는 물리학도에게 말한다. 오늘 들은 생생한 얘기 참조하면 맑스가 더 잘 읽힐 거다. 노동자들은 자본론을 그냥 삶으로 흡수한다. 막차 손잡이에 매달려 노동과 자본의 적대를 생각한다. 그 화해불가능성. 맑스의 작업은 일개의 악덕 자본가에 대한 성토가 아니다. 그러니 자본가 일명이 개과천선해서 풀리는 문제도 아니다. 맑스가 문제삼는 대상은 전체 사회의 자본, 자본 그 자체. 잉여로 생산된 가치는 사라지지 않고 눈덩이처럼 몸집을 불려 더 막강한 자본으로 행세하며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장악한다. 노동자가 일하고도 자기몫을 못받는 부등가교환이 문제가 아니라 노동이 교환가치로 전환되는 시스템 자체의 폭력성을 맑스는 지적한다. 노동이 가치증식의 수단이길 중단하고 노동이 자기단련이 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면서, 계속, 나는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