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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미망未忘 혹은 비망備忘 14


나를 빨아들이는 길.
나를 뱉아내는 길.
빠져나올 수 없는 길.
들어갈 수 없는 길.

영원토록 길이 나를 가둔다.
영원토록 길이 나를 해방시킨다.

떠나야 할 시각이 길게 드리워진다.
그가 끝나도 길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 길 모퉁이에 이따금씩
추억의 나무 한 그루 서 있을 것이다.

우연의 형식들로 다가오는 모든 필연을 견디면서
이미 추억이 다 된 나무 한 그루
백발의 나무 한 그루 서 있을 것이다.


- 최승자 시집 <내 무덤, 푸르고> 문학과지성사


악행을 저지르기를 대놓고 해본 적은 없는 거 같다. 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악행이 된 경우는 많겠지만 말이다. 항상 강박에 가까운 임무의식에 사로잡혀 살아왔다. 일터에서건 가정에서건 조직에서건. 완벽한 임무수행. 깔끔한 뒷마무리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우연의 형식들로 다가오는 모든 필연을 견디면서, 그렇게 살아왔고 그래서 문제였다. 빠져 나가는 길을 몰랐다. 크게는 결혼이 그랬고. 위클리 수유너머를 그만두고 싶어도 그러질 못했다. 창간부터 재미와 감동으로 일했는데 어느 순간 동력이 떨어졌다. 아마 글쓰기 강의를 시작하면서 즈음같다. 살림하고 공부하고 강의하고 취재까지 하려니 웹진이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인터뷰도 글쓰기도 자기복제가 되는 느낌이 들어서 불만스럽고 시시해졌다. 용기를 잃어갔다. 근데 그만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인생은 뒷심'이라고 떠벌렸던 입이 부끄러워서, 그리고 나까지 빠지면 가동인력이 너무 없어서다. 그러다가 악행을 저질렀다. 편지한통 보내놓고 편집회의에 무단결석했다. 내심은 니체수업 끝날 때까지로 기한을 정했는데 같이 밥 먹자는 요청까지 뻔뻔스럽게 '아니'라며 외면했다.         

어제 니체수업이 끝났다. 평일이라 겨울이라 마땅한 장소가 없어 엠티를 못가고 연구실에서 낮1시부터 밤12시까지 에세이를 발표했다. 할 때는 재밌었는데 몸에 무리가 간 걸까. 아침에 일어났더니 전신이 욱신욱신 쑤셨다. 침대에 이불 말고 누워 한나절을 보냈다. 입맛이 쓰고 마음이 휑하다. 글쓰기수업 한번 하고 끝날 때마다, 나는 이별한다. 징하게 이별한다. 시한부사랑처럼 각오된 슬픔이겠으나 비극적이고 궁상스러운 마음이 된다. 행복한데 불행하다. 힘을 받고 진을 뺀다. 왜 그런가. 각각의 삶 속에 깊이 들어갔다가 나와서 그럴까. 글쓰기 수업이 굿판인가. 돼지머리도 없구만; 모르겠다. 수업 끝나는 날에 맞춰 문의전화가 왔다. 다음 수업 언제 하느냐고. 뒷풀이할 때 동료들도 물었다. 다음 수업은 언제 하느냐고. 대답 못했다. 또 수업을 해야 하는지, 언제까지 해야하는지, 할 수 있을지 나도 모른다. 계획없이 사는 삶이 이럴 땐 불편하다. 일년 계획, 하다못해 일사분기 일정이라도 세워놓았다면 그대로 진행하겠지만. 하루하루 주사위 던져 사는 인생이니, 이 막막함 쓸쓸함 허전함의 트라이앵글 감내해야지. 지금은 길 모퉁이를 서성이며 인연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있다.  


* Mischa elman plays Zigeunerweisen 미샤앨먼의 연주로 듣는 지고이너바이젠. 너무 날카로워 차마 부드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