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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오르는말들

알라딘 중고서점에 책 팔던 날


하루는 딸이 그런다
. “엄마, 작가 언제 그만 둬?” 웬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린가. 그러니까 물음 자체가 비약이다. 당황스럽고 뭔가 자존심도 상했다. “그게 왜 궁금한데?” 뾰로통해서 물었더니 한다는 말. “엄마가 작가를 그만두어야 저 책들이 다 없어지고 책장이 없어야 거실에 소파를 둘 수 있잖아.” 이것은 깔대기 이론. 딸의 모든 사고와 의견은 공간문제로 귀결된다. 조금이라도 넓은 집에서 멋스러운 가구 갖춰놓고 귀족처럼 사는 게 꿈인 아이다. 질문은 신선했으되 결론은 식상했다. 그래서 까먹었다. 무의식 층위에는 저장된 모양이다. ‘책을 없애고 소파를 구하라는 명령이 

책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세 가지 사건이 계가가 됐다. 딸의 지령. 알라딘 중고서점 개장. 연구실 이사. 지난달 종로2가에 문을 연 알라딘 중고서점에 구경 갔다가 그곳에서도 책을 매입한다는 사실을 입수했다. 비슷한 시기에 연구실을 이사하면서 버리는 쾌감에 빠져들었다. 비우니까 충만했다. 자유로웠다. 그래서 결심했다. 나의 책장도 비우자. 우리 집 거실로 말하자면 삼면이 바다다. 책의 바다. 쓰러질 듯 위태로운 키다리 책장에 성인용 청소년용 초등학생용 책이 넘실댄다. 일요일 아침, 남편과 딸은 노끈을 사러 보내고 나는 목장갑을 꼈다. 책을 추렸다. 몇 년 동안 안 보는 책, 지금도 안 보고 싶은 책, 앞으로도 안 볼 거 같은 책......  

친구나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책을 기준 삼았다. 취재 때문에 의무적으로 구입한 자기계발서와 에세이가 마루에 나뒹굴었다. 저 현란한 말들의 더미. 책장 덮으면 사라지는 신기루. 둘째 아이를 위해 남겨두었던 양질의 아동도서도 왕창 묶어버렸다. 딸은 책 보는 취미가 별로 없다. 독서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세태지만, 책이라고 다 책이 아니고 교양은 교양일 뿐이다. 책의 숲에서 산다고 지혜의 샘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책이 아무에게나 속내를 열어주는 존재가 아니다. 자기가 절실할 때 좋은 이들과 함께 읽어야 피가 되고 살이 된다고 믿기에, 일단 치우기로 했다. ‘니가 원할 때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찾아 읽으렴.’ 딸도 동의했다 

종로2가 알라딘 서점. 뒷골목에 차를 세웠다. 무슨 고물상 부부처럼 노끈에 묶은 책을 양손에 들고 낑낑 거리며 한 걸음 가다가 쉬어가며 지하 계단으로 들어갔다. 허리 다쳐서 병원비가 더 나오겠다며 궁시렁 거리며 오가길 서너 차례. 점원이 놀란다. “이렇게 많은 책을 가져오시다니!” 인터넷 알라딘 사이트에서 조회해보고 오셨냐고, 구입이 안 되는 책도 있다고 양해를 구한다. 나의 목장갑에서 점원의 목장갑으로 넘어간 책들. 바코드를 찍고 상태를 입력하니 자동으로 가격이 찍혔다. ~ ~ 마트에서 시장 볼 때처럼 숫자가 부지불식간에 커진다. 밑줄이 많아서 감점이 많았다. 암튼 200여권이 남짓에서 84권이 매입가능 판정을 받았다. 총 금액 191,180. 티끌모아 태산의 인증. 이제껏 받아본 영수증 중 가장 길다.

저 책들...잘 부탁드려요.” “. 또 새로운 주인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서글서글한 눈매의 점원의 말에 짠했다. 계단을 오르다가 뒤돌아보았다. 카트에 실려 있는 책. 멀뚱하니 나를 바라본다. 눈길을 피했다. 집이 비좁아 자식을 못 키우고 입양 보내는 엄마의 심정이라도 된 듯, 신파가 솟았다손에 쥐어진 만 원짜리 지폐. 제법 두툼하다. 땡새벽부터 몸을 쓰고 현찰을 받으니 일당같았다. 몸과 돈. 날 것의 직접 거래. 인부들이 낮술로 소주를 털어 넣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삶이, 하루가, 공든 시간이 허무했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인연이 쓸쓸했다. 그렇게 회귀하는 빤한 인생이 시시했다. 둥글게 말리는 영수증을 펴서 하나씩 출석을 불러 보았다. 잠시나마 내게 열락을 선물한 이름, 내 인생의 다정했던 책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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