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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해방촌, 나의 언덕길 / 황인숙

 

이 길에선 모든 게 기울어져 있다

정일학원의 긴 담벼락도 그 옆에 세워진 차들도

전신주도 오토바이도 마을버스도

길가에 나앉은 됫돌들도 그 위의 신발짝들도

기울어져 있다

수거되기를 기다리는 쓰레기 봉투들도

그 위에 떨어지는 빗줄기도

가내 공장도 거기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소리도

무엇보다도 길 자신이

가장 기울어져 있다.

 

이 길을 걸어 올라갈 때면 몸이 앞으로 기울고

내려올 때면 뒤로 기운다.

이름도 없고 번호도 없는

애칭도 별명도 없는

서울역으로 가는 남영동으로 가는

이태원으로 가는 남산 순환도로로 가는

그외 어디로도 가고 어디에서든 오는

. 경사길.

 

- 황인숙 시집 <자명한 산책>, 문학과지성사


해방촌과 이별했다. 짐차를 보내고 정수샘 차로 비탈길을 털털털 오르면서 친히 호명했다. ()정일학원 안녕. 용왕정김치찌개집 안녕. 골목집 안녕. 수라간 안녕. 뚜래주르 안녕. 고창집 안녕. 7080콘서트 안녕. 후암동 종점 떡볶이 안녕. 용산02마을버스 안녕. 기사님도 안녕. 무거운 짐 들고 타던 꼬부랑 할머니들도 안녕. 안녕. 안녕.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나뭇잎 떼듯 속으로 읊었다. 징글징글한 이 오르막길캄캄한 밤중에 공부가 끝나고 힘의 과소상태에서 오르는 그 길이 꼭 북한산 같았다. 5분 거리가 너무 멀었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11월 무렵이면 스산함 절정이다. 남산 아래에서 서울의 가난한 야경을 보노라면 외롭고 그립고. 버스는 오지 않고. 눈물났다. 세상에서 분리된 나. 생생한 존재느낌. 이제 그런 호사를 누릴 기회가 사라지는가. 사유의 벽돌을 나르던 기울어진 그 길. 나의 감각세포를 되살려주던 그 곳. 안녕. 나의 언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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