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룻바닥에 새침하게 몸 말고 있는 신문이 가끔 내 발목을 끄잡아 당길 때가 있다. 자기 좀 봐달라고 측은한 눈길 보낸다. 그날도 그랬다. 유통기한 이틀 지난 신문을 폈다. 육자배기 같은 걸쭉한 표정의 어르신이 웃고 계신다. 윤구병 선생님이다. 고화질 TV처럼 생생한 표정. 반가워 단숨에 기사를 훑었다.
형제가 아홉이었는데 위로 일병부터 팔병이 있고 선생님이 막내 ‘구병’이라는 부분을 읽다가 뒤집어졌다. 윤일병, 윤이병...윤구병까지 중얼중얼 아홉 명을 기필코 꼽아보고야 만다. ‘아이들이 뛰어 놀아야 나라가 산다’는 대목에서는 수첩을 꺼내 적어놓았다. 부모들이 자기 자식들을 강시처럼 미이라처럼 하루 종일 책상에 앉혀놓고 학대를 한다고 일갈하시는 대목은 속 시원했다. 선생님이 벌써 예순 일곱이시다.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는 나이’라시니 또 괜히 짠하다. 아침나절 그렇게 전신 분홍 내복바람에 신문 펴놓고 온갖 상념에 젖어 있는데 전화가 왔다. 그날 오후 4시에 인터뷰 해달란다. 너무 갑자기라 어렵겠다고 얼버무렸다. 실은, 눈을 찌르는 앞머리도 자르고 서점가서 책도 볼 참이었다. 저쪽에서 약간 애원한다. 흔들렸다. 누가 나한테 뭘 부탁하면 왜 아무 것도 아닌 나한테 그러나 싶어 미안해진다.
사람이 하는 일, 꼭 안 되는 일은 없다는 신조에 따라 결단을 내렸다. 누구냐 어디냐 마감 언제냐 물었다. 윤.구.병.이란다. “알았어요. 갈게요” 속사포처럼 나온 말. 아까 신문이 나를 잡아 끈 이유가 분명해졌다. 꽃단장하고 출발했다. 서교동 ‘문턱 없는 밥집’ 옆 ‘기분 좋은 가게’에서 선생님을 뵈었다.
아침에 신문에서 뵙던 그 모자, 그 웃음 그대로시다. 선생님이 얼마 전 책을 냈다. <흙을 밟으며 살다><자연의 밥상에 둘러앉다><꿈이 있는 공동체학교> 세 권의 책을 낸 휴머니스트 출판사 편집주간이 그 자리에 동행했다.
인터뷰에 앞서, 두 분이 일정 점검하는데 선생님이 9시 뉴스 취재를 거절하신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쓰레기를 대량 양산하는 반환경적인 대기업 사보의 인터뷰도 응해주시면서 왜 안 하시려는 걸까.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넌지시 물었더니 “내 얼굴은 시각공해”라서 그렇단다. 원칙이시란다. “TV는 안 나가고 라디오는 나가”
인터뷰도 그랬다. 명쾌하고 질박했다. 자기 정리를 일찍이 마친 사람들은 중언부언하지 않는다. 지킬 것이 없으니 연연하지도 눈치 보지도 않는다. 선생님 말씀 몇 가지를 기억하고 싶다.
첫째, 도시문명은 지속불가능하다. 도시는 생산지가 없다. 소비의 공간이다. 물질에너지는 머지않아 고갈된다. 도시에서 사흘만 단전단수 돼도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 농촌에 주말마다 애들 데리고 가서 일하고 놀다 와라. 애들이 뛰어 놀아야 나라가 산다, 도시와 농촌이 서로 돕고 사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자급자족의 해야한다고 신신당부 하신다.
둘째, 자율성이 생명의 근원이다. 선생님이 15년전 설립한 변산공동체는 정식명칭이 변산공동체‘학교’다. 왜 학교냐 하면, 애고 어른이고 자기 앞가림 하고 사는 법을 배우는 곳이라 학교다. 그간 수많은 이들이 다녀갔는데 겉에서 스윽 보고 간 사람은 다시는 안 오고, 3박4일 머물다 간 사람은 꼭 다시 찾고, 변산공동체에서 1년을 보낸 사람은 도시로 돌아가지 않는단다.
이유는 이렇다. 농사를 지으면 자연에 순응하게 된다. 타율적인 통제가 없다. 도시에서 시간, 분, 초 단위로 타인의 통제를 받고 살다가 농사지어보니 속박 없어 좋은 거다. 모든 생명의 근원은 자율성이다. 농사주기가 1년. 그 기간 동안 자율성을 맛본 사람은 다시는 통제시스템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고.
셋째, 우리는 모든 바람에 씨를 뿌린다. 인터뷰 의뢰한 회사가 예전에 노조 비정규직 탄압했던 데 모기업 사외보라는 이야기를 편집주간에게 들으셨다고. 그런데도 모든 바람에 씨를 뿌린다는 마음으로 나오셨단다. 나쁜 사람들이 하는 회사지만 안 그런 사람들도 많이 보니까, 한 사람이라도 생각이 바뀌면 좋은 것 아니겠는가 하신다. 좋은 기운이 널리 퍼지면 좋겠다시며. 우리는 모든 바람에 씨를 뿌린다. 이 말은 프랑스의 유명한 출판사 슬로건이란다.
넷째, 자연에게 겸손과 나눔을 배운다. 인간은 제 때 씨 뿌리고 제 때 김 매고 제 때 거두기만 하면 된다. 나머지는 바람님, 해님, 물님이 다 알아서 24시간 쉬지 않고 키워준다. 볍씨 한 알 뿌리면 수 천 알이 나오지 않는가. 지수화풍. 큰 존재 앞에 인간은 작다. 겸손을 배운다. 또 완전 유기농법을 쓰면 ‘쌓아 두질 못한다.’ 금방 썩으니까. 먹을 만큼만 거두고 썩어서 버릴 바에야 이웃과 나누게 된다. 자연은 나눔을 가르친다.
이 대목에서 잉여와 축적을 생각했다. 자본론의 핵심 키워드. 잉여. 잉여가 생산되는 구조를 막아야 하나, 잉여의 용도를 달리해야 하나. 내 친구는 집요하게 고민하는데. 아무튼 인간에게 축적욕이 생긴 것은 화폐의 출현 이후다. 쌀이나 구두는 아무리 좋아도 무한정 쌓아두기 어렵다. 공간의 한계상, 속성상 그렇다. 썩고. 질린다. 하지만 화폐는 무한축적이 가능하다. 윤구병 선생님 말씀대로 ‘불쏘시개로도 쓰지 못하는 돈’의 위력은 그래서 커졌다. 돈이 돈을 낳는 무한증식. 무한축적. 그렇지만 화폐에 대한 '신앙의 카르텔'이 깨지면 돈은 불쏘시개로도 쓰지 못하는 휴지조각이 되어버린다. 화폐는 화폐라는 믿음하에서만 화폐니까.
'잉여'를 모르는 자연. '나눔'을 가르치는 자연. 그런 자연을 닮은 삶의 추구. 그 진귀한 씨앗을 모든 바람에 뿌리는 농부철학자, 윤구병 선생님을 만나고 오는 길. 불현듯 '어른'을 뵈었다는 느낌이 뇌리를 강타했다. 왜 느닷없이 '어른'이란 단어가 떠올랐을까 싶어 사전을 찾아봤다. 어른.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