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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서울의 병 / 장석주 '아무나 위독한 서울을 살려다오'


새해가 열리고 다음날. 2008년 증권선물시장 개장식 취재를 갔다. 거래소 입구에 커다란 검은 관이 놓여있고 구슬픈 상여소리가 들렸다.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농성중인 코스콤 비정규직 동지들이 준비한 퍼포먼스였다. 암울했다. 겹겹이 둘러쌓인 경비망을 뚫고 거래소 본관 로비에 들어서자 첼로 선율이 귀를 간질이고 증권사 사장들 및 재계 관계자들이 혈색좋은 얼굴로 잔뜩 모여 있었다. 그때만해도 지수가 3000천 포인트 간다고 들떠 있을 때니 새해새출발새희망으로 거의 축제 분위기였다. 안과 밖의 상반된 상황이 얄궂었다. 날씨가 풀리고 봄이 되어 코스콤비정규직 노동자 투쟁 200일 행사가 있었다. 그곳에서 두어 시간 앉아 같이 박수도 치고 노래도 부르고 그간 싸운 이야기도 들었다. 거래소앞 천막을 지날 때마다 추워서 어쩌나 동지 가족들은 뭘로 먹고 사나 걱정스러웠는데 그날 현장에서 보니, 늘 그렇지만 가장 나약한 건 한발짝 떨어져 바라보는 사람이다.

삼백일이 지나고 사백일이 지났나보다. 월요일에 거래소에 일이 있어서 갔다. 입구에서 동지 20여 명이 대오를 짜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단식농성'을 시작했더라. 아, 배고파. 단식농성이란 말만 들어도 어지럽다. 직접고용이 보장되면 정규직화는 양보할 수 있다는데 협상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하니 어떻게 해결이될지 막막하다. 서울역. 여의도. 구로동 등등. 서울풍경의 일부가 되어버린 투쟁의 현장들. 상여소리도 단결투쟁가도 종종걸음을, 눈길을 붙들지 못한채 이백일 가고 삼백일 지나 오백일을 맞는다. 손안의 작은 세상 핸드폰으로 신문으로 펀드걱정으로 눈 가리고 귀 막아버리고 서로의 안색을 살피지 않는 사람들. 도시에 살면 누구나 그렇게 된다. 기형도가 서류뭉치같다고 냉소한 빌딩숲, 자본의 표상, 여의도는 더 춥다. 겨울이면 차디찬 콘크리트 빌딩에서 냉각된 바람이 불어 유독 춥고 휑하다. 여의도를 걸으면 그렇게 쓸쓸할 수가 없다. 종로구에서 스러져간 시인 기형도가 좋아한 장석주의 시를 꺼내읽으며 내 고향 서울을 애도했다.
 

   

   가는 빗발 날리는 종로를 걷다가
   느닷없이 서울의 비명을 듣는다.
   우리 중 아무도 미처 눈치채기 전에 서울의 신음소리는
   도처에서 몰려나와 거리에 넘치고
   너무 많은 구둣발이 신음소리를 밟고 있구나.
   오호라 서울 시민들은 귀가 먹었다.
   밤마다 철근이 박힌 상처를 끌어안으며
   상한 짐승처럼 엎어져 잠들지 못하고 울부짖는
   서울의 비명을 못 듣는구나.
   아무나 위독한 서울을 살려다오.
   서울의 하늘에 신선한 산소를 다오.
   깨끗한 햇빛을 아니 조용히 놓아만 다오.
   잠들지 못하는 이유를 알기 위하여
   밤마다 울부짖는 이유를 알기 위하여
   서울 변두리의 몇 포기 풀을 뽑아보라.
   죽은 풀뿌리가 움켜잡는 죽은 흙덩이
   새잎을 돋게 하던 서울의 뿌리가 썪고 있구나.
   서울의 혈관을 흐르는
   서울의 정신은 함부로 더렵혀졌구나.

   서울의 병 - 장석주, 시집 <햇빛사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