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튀세르는 구조주의적 경향을 띈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평가받는다. 정신분석학에서 원용한 중층 결정(혹은 과잉결정) 또는 구조적 인과성 이라고 하는 개념에 기초하여, 종래의 마르크스주의의 일원적인 토대- 상부구조론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했다.
정신분석은 이데올로기 비판이다
정신분석과 이데올로기의 관계는 막연히 짐작 가능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억압된 모성이 홧병으로 나타나는 것, 유아 때부터 사교육 쓰나미에 휘말리던 동심들이 학습장애를 일으키는 것 등의 사례는 ‘정신분석은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야 한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정신병원이 혁명의 공간이어야 하는 이유가 거듭 확인되는 지점이기도 했다.
정리해보자면, 이데올로기는 메타적인 개념이다. 관념들의 다발 자체가 아니라 관념들의 발생기원에 대한 가장 보편적이고 원초적인 관념체계이다. 이데올로기는 그 관념의 외부적 생성원인을 은폐함으로써 현실구성 기능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관념의 외부적 발생원인과 기능을 비판할 때 이데올로기는 자신의 작동을 멈춘다. 정신분석은 의욕이나 욕구, 의도와 목적의 복합체인 표상 형태들의 발생기원을 보편적 감각의 질서(외디푸스콤플렉스)로 환원한다. 정신분석은 신경증 환자의 이데올로기, 즉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관념의 발생기원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관념의 원인과 기능을 드러냄으로써 더 이상 이데올로기가 작동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정신분석이 이데올로기 비판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신분석은 무의식적 감각표상을 생성하는 신체의 욕망의 형식을 분석함으로써 이데올로기를 넘어설 수 있다. 예를 들어 ‘나 명품이 좋아’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명품에 대한 욕구의 발생기원에 대한 관념, ‘그건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감각 때문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이데올로기다. 허위의식의 물질적 기능을 밝힘으로써 어떤 물질적 효과 (신체적 변이)를 기획하는 것이 유물론적 실천이 되는 것이다.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는 표상적 관계가 아니라 작용적 관계다
관념의 외부에 있는 것은 결코 관념에 의해 표상되지 않는다.’ 이 대목이 가장 끌렸다. 아무래도 내가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관계를 ‘건축학적으로 오해’했던 모양이다. 상부구조는 하부구조를 반영하며, 하부구조의 변화에 따라 상부구조는 그에 조응하는 형태로 변화한다고 말이다. 아니다.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는 표상적 관계가 아니라 작용적 관계다.마르크스는 관념의 외부적 원인인 ‘물질’을 ‘생산관계’에서 찾는다. 알튀세는 이 물질을 사회를 구성하는 토대로서의 생산관계로 정식화 한다. 생산관계가 이데올로기에 대해 외부적 관계에 있다는 말은 그것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반영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마르크스가 사회구성체의 심급들을 하부구조(생산력과 생산관계의 통일체)와 상부구조(법과 국가, 이데올로기)로 나눌 때 둘의 관계는 외부적이다.
유물론적 정신분석은 유사-원인(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좌절되었다는 관념)의 원인을 관념 외부의 물질적 생산관계에서 찾는 것이다. 그의 리비도적 신체 상태와 그 신체가 다른 신체들과 맺는 리비도 생산의 관계 양상을 봐야 한다. 가족적 배치, 사회적 배치, 신체적 배치 등 그것이 최종원인이다. 이 물질적 원인은 ‘인식’대상이 아니다. 표상되지 않는다. 이 앎은 표상적 인식이 아니라, 실천적 지식이며, 신체적 앎이다. 그렇다고 정신분석을 통해 도달한 원초적 관념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물질적 원인을 은폐하는 기능을 한다.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동력은 무엇일까
흔히 노동운동은 지분투쟁의 한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들 말한다. 진보신당을 비롯한 진보진영도 ‘생태, 평화, 여성’ 등 생활 속의 진보 등에서 돌파구를 찾는다. 그런데 교육감 선거 등 몇 번의 선거를 치르고 뼈아픈 좌절을 맛보면서, 더 근원적인 모순을 치고 들어가는 투쟁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것이 답이 될 것 같다. 이데올로기 투쟁으로서의 ‘가치투쟁’ 말이다. 정수샘 강의안을 인용하자. “계급투쟁에는 단순히 필요가치의 양을 둘러싼 임금투쟁만 있는 게 아니라, 필요가치의 가치 자체를 둘러싼 욕망의 투쟁도 있다. 영어상품, 교육상품, 보혐상품 등 상품가치의 가치를 둘러싼 투쟁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민노당과 민노총은 프롤레타리아의 이익단체로 기능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형식적 틀 안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그들은 ‘지분투쟁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 결국 자본주의 생산관계와 부르주아 국가 자체의 ‘재생산’ 기능에 복무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 실현장치(지분투쟁)를 넘어 부르주아 체제 자체의 외부를 향하는 운동의 동력은 무엇일까. 박정수는 정신분석의 교훈을 따라 ‘욕망’이란 이름을 붙였다. “합리적인 이해관계의 원칙(쾌락원칙)을 넘어, 원칙의 심층에서, 원칙의 외부에서 이해관계를 추동하면서도 이해관계의 한계와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무의식적 욕망”이라고. 이부분은 좀 감이 잡히질 않는다.
알튀세의 이데올로기 호명이론
알튀세는 국가를 기계로 정의하고 기관으로 세분했다. 학교기관, 종교기관, 가족기관, 문화기관, 언론기관들이 이데올로기적 기관들이다. 이 기관들이 생산하는 이데올로기가 국가이데올로기다. 국가의 발생기원을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관념으로 환원함으로써, 국가의 존재기원이 외부에 있다는 사실을 - 국가는 착취계급이 피착취계급을 억압함으로써 계급적 착취적 생산관계를 재생산하는 기능을 한다 - 은폐하는 관념 체계이다. 알튀세는 또 국가의 ‘억압적 장치’와 ‘이데올로기 장치’를 구분한다. 경찰의 시위대 진압은 억압적 방식이고, 그것을 불법행위로 여기고 자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하지 않게 하는 것이 이데올로기적 방식이다.
알튀세는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란 표현을 쓰면서 이데올로기를 새롭게 정의했다. 이데올로기를 통한 지배의 비강제성, 비폭력성, 비신체성을 강조한다. 알튀세는 저절로, 자기스스로, 복종하게 하는 이데올로기의 기능에 주목하면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새로운 규정으로 나아간다. 이데올로기는 고도로 무의식적 습관, 관계, 무의식적 행위들 안에서 찾아야 한다. 무의식적 관념체계라는 정신분석적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이데올로기에 대한 유물론적 접근이 가능해진다. ‘네 생각 속에 이데올로기가 있는 게 아니라, 네 습관과 행위 속에 이데올로기가 있다.’ 무의식의 과학으로서 정신분석학이 유물론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우리는 말과 표상을 믿지 말고 그 표상을 생산하는 제도와 장치와 실천들의 물질적 효과를 알아야 한다. 무의식적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효과는 이데올로기적 제도, 장치, 실천들의 재생산이다. 지배적인 생산관계의 재생산이다. 영어교육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 외에도 영어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집단과 없는 집단을 나누는 ‘계급화’의 효과도 거둔다.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한다. 이데올로기의 목적지는 주체에 의해서만, 주체라는 범주와 이 범주의 작용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것이 그 유명한 알튀세의 ‘호명이론’이다.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인식하게 하는 상상적 표상이 아니라, 자신이 사회적 생산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특정한 집단(계급)의 주체/일원임을 인정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적 주체형성에 있어서도 상상적 호명과 인정의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투자자들 모여라’ 호명에 따라 실천을 하는 자들에 의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재생산된다. 그러니까 중산층 같은 계급은 월소득에 따라 구분되는 게 아니다. 이데올로기 장치의 호명에 대해 어떤 실천을 하느냐, 일련의 정치적 행위에 따른 사후적 결과들로 규정된다는 것이다. 알튀세의 호명이론은 정말 매력적이다.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에 따른 결정적 한마디를 구호로 만들어 호명한다면 생각보다 일은 쉽게 풀리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니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