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파농의 역작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의 마지막 문장이다. 파농은 왜 물음을 던지는 자로 살고자 했을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늘 묻게 하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식민지의 아들’이라는 파농의 삶의 조건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파농은 1927년 프랑스령 마르티니크 섬의 포르 드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들과 프랑스 출신의 백인, 그들 사이의 혼혈인(뮬라토)으로 구성된 프랑스 식민지이다. 파농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프랑스군에 지원해 각지에서 파시즘 세력과의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전후에는 리옹 대학에서 정신의학을 전공해 학위를 취득했다. 알제리의 정신과 의시로 근무하다가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에 대한 활동을 지원하고, 1957년 아예 혁명가로 투신한다.
이렇듯 파농의 삶의 현장은 치열했다. 프랑스 식민지에 태어난 흑인이라는 독특한 주체-위치에 놓임으로써 백인과 흑인, 제국주의와 식민지라는 구분선이 어떻게 그어지고 맞부딪쳐 개개인의 삶에 개입하는가를, 한 눈에 보고 경험할 수 있었다. 차별과 모순의 현장을 목도했고, 그것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다. 흑인은 왜 프랑스어를 열망하는가. 흑인여성은 왜 백인남성을 원하는가. 흑인은 왜 결핍을 느끼며 열등감을 지닌 채 살아가야하는가 등등을 질문했다. 이것이 파농의 삶을 이끌었다. 질문의 능력은 곧 사유의 능력이고, 사유의 능력은 곧 삶의 능력이다.
게다가 파농은 정신과 의사였다. 임상경험을 토대로 식민지인들의 다양한 심리적 억압기제를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흑인과 백인, 가학자와 피학자 사이에 작동하고 있는 지배와 통제의 메커니즘을 파헤쳐냈다. 개인의 문제를 보편의 문제로 확장시키면서 그 안에서 어떤 원리를 찾아냈고 그것을 기반으로 ‘식민주의 심리학’을 태동시켰다. 늘 질문을 던짐으로써 삶을 이어갔고, 살아감으로써 답을 찾아간 파농.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파농의 질문지이자 답안지이다.
1. 흑인과 언어 - 불어는 미끼다. 까만 피부라는 물질성 앞에 언어의 상징성은 무기력하다.
자크 라캉에 따르면 인간은 언어 속으로 태어난다. 개별 인간은 언어를 받아들임으로써 사회적 주체가 된다. 언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물을 언어로 대신 표상한다는 것이며, 자신의 욕망을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주체-위치 중에서 정신병은 예외적이다. 정신병자는 사물과 욕망을 언어로 대리표상하는 것이 받아들이지 않은 자다. ‘사회적으로 소통되지 않는 자로 취급된 자’가 정신병자다. 박찬욱 감독의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를 보라. 한국인처럼 생긴 네팔 이주노동자가 자국어를 구사했는데 한국인이 미친 줄 알고 6년이나 정신병원에 감금당한 실화를 영화화 했다. 이처럼 언어는 권력관계에서 주체-위치의 자리매김에 매우 중요하다.
파농이 사는 나라에서는 대부분 하층민은 일상어인 크레올을 사용하고 고등교육 이상을 받은 중산층은 표준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이언어적 현실은 프랑스의 식민지 동화정책의 산물이다. 프랑스는 마르티니크 흑인들을 피지배자가 아니라 프랑스 국민으로 인정했고, 프랑스어를 훌륭하게 구사해야 한다고 유혹했다. 그런데 이는 실현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식민지에 대한 착취와 차별이 없다면 식민지는 존재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랑스어를 사용하라!’는 공식명령과 식민지언어 크레올을 사용하라!‘는 이면의 명령을 동시에 작동하게 된다. 이러한 식민주의의 이중구속 속에서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주체-위치‘를 구별하는 물신화된 상징이 된다. 이에 대해 파농은 “불어 구사능력에 따라 백인화 정도를 평가받는다.”라고 진단했다. 프랑스어를 ‘소유’함으로써 ‘존재’를 바꾸는 것이다. 이처럼 원시인, 흑인의 존재를 폐기하고 문명화된 백인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자신을 결여된 존재로 인정하고 불어를 소유함으로써 완전한 인간이 되려는 식민화된 소망이다. 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여성이 갖는 남근 선망과 상동적이다. 식민주의 속에서 내지의 언어는 남근의 상징이다. 식민지가 여성으로 성별-표상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까만 피부라는 물질성 앞에 불어의 상징성은 무기력하기 그지없다. 불어의 소유를 통한 백인화의 소망은 식민모국의 타자에 의해 좌절된다. 불어의 남근적 위력은 식민지에서만 통할 뿐 정작 프랑스 본국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프랑스에서 흑인의 유창한 불어구사는 흑인의 열등감을 도드라지게 드러내는 기표가 될 뿐이다. 식민지에서의 남근기표가 식민모국에서는 결여의 기표로 전도된다. 선망하면 할수록 소유하면 할수록, 식민지 흑인의 결여는 더욱 선명해진다. 원래 외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남근이란 실재의 성기가 아니라 ‘결여(부재)’의 형식 속에서만 작동하는 ‘상징’이기 때문에 그렇다. 불어는 식민지와 식민지 본국 사이의 차이를 도입하기 위한 가상의 미끼다.
2. 흑인의 남근선망 - 결여를 중심으로 한 권력과 욕망의 삼각함수의 작동이다.
외디푸스화된 식민지 여성은 백인남성의 남근을 소유함으로써 백인과 가까운 아이를 낳음으로써 흑인성으로부터 탈출하려 한다. 뮬라토 여성은 백인이 되고 싶다는 남근선망과 동시에 흑인으로 되돌아갈지 모른다는 거세공포까지 더해진다. 식민지 흑인남성 역시 백인여성을 통한 백인화의 소망을 갖는다. 그가 진정 원하는 것은 ‘백인남성처럼 사랑받는’ 것, 즉 백인남성의 성적 위치이다. 흑인남성의 성적 판타지에서 그가 동일화한 백인남자는 외디푸스 콤플렉스에서의 아버지의 자리에 있다.
한편, 흑인 지식인은 백인여성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녀에 대한 사랑에서 흑인의 성욕과 그 속에 섞여 있는 수세기에 걸쳐 내 종족에서 가해를 입혔던 백인에 대한 흑인의 증오도 읽어내기 때문이다. 그 포기는 이중적이다. 백인여성을 향한 사랑의 포기에는 백인남성을 향한 리비도적 증오의 포기가 포개진다. 즉, ‘포기 신경증은’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는 흑인성의 억압에서 비롯된 것이다.
백인남성-백인여성-흑인남성 사이의 인종주의적 삼각관계는 아버지-어머니-아이 사이의 외디푸스적 삼각관계와 동일한 구조, 즉 <권력의 담지자-욕망의 대상-결여된 주체>의 구조를 갖는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외디푸스 콤플렉스가 보편적으로 있고 그것이 특수한 인종주의 콤플렉스로 투사 반복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결여를 중심으로 한 권력과 욕망의 삼각함수를 유아기 가족에 투사한 것이 외디푸스 콤플렉스다. 이미 권력과 욕망의 함수관계로 형성된 사회적 신체가 있고, 그 위에 등록된 흑인가족이 있는 것이다.
3. 식민지의 열등콤플렉스 - 부족적 전통이 아니다. 흑인은 백인과의 관계에서만 흑인이다.
프란츠 파농은 계통발생과 개체발생 외에도 사회발생론이 있다고 주장했다. 사회발생론은 ‘주체’를 내포한 개념이다. 흔히 사회적이란 말은 개인의 주관적 차원을 넘어선 객관적인 역사, 제도적 차원을 가리키지만 파농에게 ‘사회적 차원’의 핵심은 오히려 주체의 개입에 있다. 그러니 식민지인들의 심리를 사회적으로 진단한다는 것은 단지 개인적 차원 너머의 객관적 변수를 고려한다는 것이 아니다. 즉, 식민지 흑인의 열등 콤플렉스는 그들의 부족적 전통 속에서 선조들과 맺어온 의존적 관계라는 등 주체적 의지와 힘의 작용을 배제한 사회심리학에 대해 파농은 비판적이었다.
식민지 원주민사회의 의존콤플렉스는 객관적으로 존재해왔던 게 아니라, 백인 문명사회와의 조우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원인과 결과가 뒤집혔다. “문명인과 원주민간의 조우가 식민주의와 같은 독특한 환경을 조성하게 되었다.” 백인에 대한 흑인의 열등콤플렉스를 설명하기 위해 흑인 특유의 정체성을 분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가 말라시아인인 이유는 백인의 출현 때문”이며 “흑인은 백인과의 관계에서만 흑인이기 때문이다.” 이 ‘만남’과 ‘관계’의 주체적 차원을 고려하지 않을 때 정신분석학은 객관적 실체의 함정에 빠지고 만다.
앙띨레스 사회에서 신경증은 (외디푸스콤플렉스 때문이 아니라) 책, 신문, 교재, 영화 등 유럽사회로부터 도입된 매체를 통해, 유럽인의 관점에서, 식민주의적 동화정책 달성을 위해 유포된 흑인에 대한 백인의 집단 무의식과 접촉하면서 발생한다. 흑인 하면 야만성, 생식기, 권투선수,죄 등을 떠올리는 백인의 집단무의식이 식민지 흑인 아이들에게 직접 투사된다. 유럽의 타자로서 흑인이미지를 자아이미지로 주입받은 흑인 아이들이 식민지 사회구조에 의해 직접 외디푸스화 되며, 그 자아분열을 감당 못할 때 정신병에 걸린다. <사회적 구조 이전에는 어떤 외디푸스적 구조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