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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칼럼

벨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

3년 전 초여름, 동료들과 전주로 1박2일 엠티를 갔다 왔다고 하니 선배가 말했다. “너는 고3 엄마가 6월 모의고사 보는 날 놀러 갔니?” 이 질책이 의미하는 바를 몰랐는데, 6월과 9월 모의고사가 대입의 명운을 가르는 중대한 시험이란다. 특히 6월 모의고사 성적은 거의 수능 점수로 보면 된다고. 알고 나서도 어리둥절했다. 그렇다면 그날 엄마 된 자로서 무얼 해야 하는지 몰라서이고, 내 정체성이 고3 엄마로 명명된 상황이 뜬금없어서다. 

고3 엄마의 본분에 대한 무지와 나태는 11월까지 이어졌다. 수능 날도 도시락 싸서 보내놓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이제 와서 새삼 예배당을 갈 수도 없는 노릇. 그냥 광화문 카페로 달려가 책을 폈으나 책장은 그대로다. 아이가 답안지를 밀려 쓰는 건 아닌지 따위의 별별 걱정에 마음이 콕콕 조여왔다. 긴 하루를 보내고 이듬해 모 대학 ‘추가 합격자’ 명단에 아이 이름이 오르면서 고3 엄마를 간신히 면했다.

그 심란한 겨울을 보내고 나니 입시를 왜 ‘입시 전쟁’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할아버지의 재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 동생의 희생까지 네 박자가 맞아야 아이가 명문대에 간다는 말에는 거짓이나 보탬이 없다. 그런데 생업은 제쳐둔 채 입시설명회에 다니고, 수백 가지가 넘는 수시 전형을 파악하고, 고가의 입시 컨설팅을 받는 학부모가 얼마나 될까.

ⓒ시사IN 신선영

올해도 친한 친구들이 수험생 부모가 되었다. 아이가 수시 원서 넣을 대학을 정하느라 두통약을 먹고, 시험장에 따라다니느라 업무 시간을 뺐다. 원서비만 100만원에 육박했고, 시험 날이 다가올수록 심야 할증요금 붙듯 마구 오르는 학원비에 기겁했다. ‘비(非)강남권’ 지역의 학원도 사정이 이랬다. 입시 전쟁에서 살아남기는커녕 끼어들기만 하려 해도 적지 않은 판돈이 든다. 전쟁으로 군수산업이 돈을 벌고 힘없는 병사들이 죽어가듯 입시 전쟁에는 학원산업이 득을 보고 평범한 아이들은 조용히 스러져간다. 

11월 들어 고등학교 두 곳에 강연을 갔다. 과학 고등학교에서 글쓰기에 관심 있는 아이들과 일반 고등학교에서 흡연 예방 교육을 받는 아이들을 각각 만났다. 과학고 아이들에게 아르바이트를 해봤느냐 물었더니 “저희가 시간이 어딨어요” 한다. 사교육의 최전선을 일찍이 통과한 그 아이들은 평일에는 기숙사에서 살고 주말에는 귀가해 사교육을 또 받는다. 

흡연 예방 교육에 온 한 학생은 주유소 알바를 하다가 돈을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그만둔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 아이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전국에서 대학진학률이 최하위권이라고 담당 교사가 전했다.

수능 한파를 몰고 오는 그들의 비명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모티브북 펴냄
<벨 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를 쓴 벨 훅스는 가난한 흑인 여성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서 “자신들은 선택받았고, 특별하며, 이렇게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행운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백인들(13쪽)”을 만나면서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와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자각한다. 그녀는 마르크스도 구체적인 해법을 알려주지 않는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복잡한 계급 문제(62쪽)”에 맞닥뜨린다.

남의 얘기 같지 않았다. 인간은 경험적 존재다. 태어나면서부터 부유했고, 가난과 가난으로 인한 고통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이, 공감 능력이 아닌 학습 능력만 평가하는 제도를 통과해 이 사회의 엘리트층을 이루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분명 문제다. 우리 사회의 경제 체제가 공정하게 변화하기 위해선 계급 분리를 조장하는 입시 제도부터 달라져야 할 텐데, 현실은 요원하고 수능은 요란하다. 

올해도 수능 추위가 예고됐다. 딱히 대학을 거부할 소신이나 대안이 없고 이른바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재력과 실력도 간당간당한, 대다수 학부모와 아이들의 비명이 매년 수능 한파를 몰고 오는 게 아닐까. 


* 시사인 은유 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