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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옆소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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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별 해금공연> 낭만파 모녀 떠나다 “엄마, 꽃별언니꺼 틀어줘” 딸아이가 분홍꽃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당기면서 당부한다. 그동안 간간히 해금연주를 듣긴 했으나 며칠 전부터 아예 해금소리를 자장가 삼아 청한다. 해금천리라더니. 해금 두 줄에 실려 멀리 꿈나라로 여행 떠나는가 보다. 딸아이의 해금사랑은 지난 4월 덕수궁 꽃놀이에서부터 시작됐다. 고백하자면, 그동안은 딸아이와 어딜 놀러가는 게 나에겐 절대 놀이가 아니었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일거수일투족 챙겨야 하는 돌봄 노동의 연장이었다. 딸아이가 예쁜 것과는 별개로, 집을 벗어나 야외에서까지 뒷바라지하는 게 참 귀찮았다. 고되고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딸아이가 초등학생이 되고나서 한결 의젓해지자 생각이 달라졌다. 지 한 몸 너끈히 추스르게 되니까 친구처럼 느껴졌다. 오동통한 손을 잡고 허리..
<더리더> 말 없는 사랑이 평생 가는 걸까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1950년대 독일. 15살 소년 마이클은 열병에 걸려 길 한복판에서 심한 구토를 일으키고, 그 앞을 지나던 여인 한나는 그를 도와준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고, 그녀는 어느 날부턴가 사랑을 나누기에 앞서 책을 읽어줄 것을 부탁한다. 소년은 , , ,를 읽어준다. 이 영화는 내겐 너무 매력적인 장치로 가득하다. 하늘만이 허락한 남녀의 불꽃같은 사랑이 평생을 집어삼키는 설정도 그렇거니와, ‘책’이 두 사람의 사랑을 묶어주는 인연의 끈으로 작용하는 점, 책으로 인해 삶이 자극받고 사람이 변하는 과정이 드러나는 것도 감동적이다. 그런데 잘 헤어지는 게 잘 사랑하는 거라고 믿는 관점에서는 오십 점짜리 멜로영화다. 감점의 요소를 제공한 한나의 소통불능적인 성격이 안타까웠다. 글을 볼..
<워낭소리>할아버지와 <송환>장기수 할아버지 닮은 점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든 것은 두 분의 입이다. 하루에 한 마디를 채 안 하는 할아버지의 꾹 다문 고집스러운 입. 마치 노동요처럼 신세타령이 구성지게 이어지는 할머니의 한탄스러운 입. 그리고 한평생 논매고 밭 가느라 구두 뒤축 닳듯이 닳아버린 투박한 손이 보였고, 뼈마디가 톡 끊어져버린 뼈 빠지게 일한 할아버지의 앙상한 발, 대나무같이 파리한 다리가 눈에 걸렸다. 수만 개 태양의 흔적이 남긴 잡티와 검버섯으로 뒤덮인 할머니의 거무튀튀한 얼굴까지. 두 어르신의 몸의 부분별 잔상이 오래 남았다. 무슨 고흐의 그림을 보듯 빨려들었다. 장기수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를 담은 때도 그랬고, 싫지 않았다. ‘늙은 얼굴’을 영화가 아니면 그렇게 오래토록 부분 확대해서 들여다보고 있을 기회가 사실은 없다..
<원스> 시간을 견디는 사랑이 있을까 처음 당신을 알게 된 게 언제부터였던가요. 이제 기억조차 까마득하군요. 당신을 처음 알았을 때, 당신이란 분이 이 세상에 계시는 것만 해도 얼마나 즐거웠는지요. 여러 날 밤잠을 설치며 당신에게 드리는 긴 편지를 썼지요. 처음 당신이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전갈이 왔을 때, 그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득히 밀려오는 기쁨에 온몸이 떨립니다. 당신은 나의 눈이었고, 나의 눈 속에서 당신은 푸른빛 도는 날개를 곧추 세우며 막 솟아올랐습니다. 그래요, 그때만큼 지금 내 가슴은 뜨겁지 않아요. 오랜 세월, 당신을 사랑하기에는 내가 얼마나 허술한 사내인가를 뼈저리게 알았고, 당신의 사랑에 값할만큼 미더운 사내가 되고 싶어 몸부림했지요. 그리하여 어느덧 당신은 내게 '사랑하는'분이 아니라, '사랑해야할 분'으로 바뀌었..
<비포선셋> 옛사랑과 격한 100분 토론을 벌이다 오래전 주택복권이 나오던 시절, 인생역전을 노리며 매주 복권을 사는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지갑에는 항상 1억 원 상당이 들어 있어." 틀린 말은 아니다. 결과를 보기 전까지 복권이 1억 원의 가치를 갖는 건 사실이니까. 내겐 사랑이 복권이다. 내 가슴에는 항상 운명적인 사랑이 들어 있다. 복권당첨을 소망하던 그처럼 난 사랑당첨을 꿈꿔왔다. 여러 숫자들의 우연한 배치가 복-돈이 되듯 다양한 감정이 운동하다가 충돌해서 불-꽃을 일으키는 거다. 일상에서든 영화에서든 소설에서든 상관없다. ‘사랑’ 그 자체, 그러니까 전무후무한 기념비적인 사랑을 보고팠다. 은 그런 나의 오래된 러브로망을 구현해준 억만금짜리 영화다. “기념비란 잠재적 사건을 현실화함이 아니라, 그것을 구현시킴, 즉 거기에 실체를 부여함이다...
<퍼> 카메라를 들고 떠난 그녀의 색계(色戒) 언젠가 말씀드렸지요. ‘부치지 않은 편지’는 제가 가장 아끼는 노래입니다. 아마도 ‘부치지 않은 편지’를 쓰게 되려고 그랬나 봅니다. 오늘은 가시나무새처럼 슬프면서 파랑새처럼 희망어린 어느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잿빛 톤에 잔잔한 격정이 흐르는 포스터에 끌리듯이 보게 된 영화는 라는 작품입니다. 주연배우가 니콜 키드먼이었습니다. 그녀는 과 에서 멋진 연기를 보여주었지요. 그녀가 꼭 몇 백 년 된 나무처럼 크게만 보였던 영화였습니다. 시선을 던지거나 움직일 때마다 대숲소리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이번에도 그녀는 큰 배역에 도전했더군요. 아름다움과 추함의 경계를 허문 사진가 디앤아버스 퍼는 디앤아버스(1923-1971)의 전기 영화입니다. 사실 디앤아버스라서 좀 놀랐습니다. 그래요. 디앤아버스..
인디밴드 헌정공연 - '인권이형 사랑해요' '우리는 전인권씨의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후배로서 전인권씨에게 그의 음악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전하기 위해 이 공연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 설 연휴 막바지인 지난 8일과 9일, 이틀에 걸쳐 홍익대 근처 한 클럽에서는 '인권이형 사랑해요'라는 공연이 열렸다. 황보령밴드, 이승열과 서울전자음악단, 한상원, 주찬권, 정경화, 로다운30, 코코어, 허클베리핀, 노브레인 등 관록파 뮤지션부터 실험적인 밴드까지. 웬만한 록 페스티벌을 방불케 하는 쟁쟁한 라인업이다. 하루 빨리 무대에서 노래하는 전인권을 보고 싶다는 소망으로 후배들이 모인 것. 하지만 대외적인 언론 홍보는 없었다. 홍대 근처에 포스터 몇 장 뿌린 게 전부다. 공연장 입구에는 '언론의 취재 대상이 되길 원치 않는다'는 정중한 메시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