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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세상

강남역 8번 출구



‘날씨가 추워지는데 혹시 담요는 있나요.’ 근 5년 만에 메시지를 보내고 답을 기다리다 무작정 발길을 옮겼다. 강남역 8번 출구 방향이랬다. 지하도를 빠져나오니 또 하나의 도시다. 잿빛 하늘 아래 푸르스름한 건물들이 어지러이 완강하다. 몇 걸음 내딛자 야트막한 비닐 천막 앞. 이곳에서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은 지난 10월 7일부터 농성 중이다. 


똑똑, 지나가는 시민인데요. 굵어지는 빗발을 피해 몸을 접어 안으로 들어갔다. 준비한 담요를 건네고 전단지를 보는 둥 마는 둥 나는 뿌연 비닐 천장 위로 고개를 들어 삼성전자 건물을 찾았다. 대관절 어딜까 물었더니 이 일대가 전부라고 했다. 저게 삼성전자, 저건 삼성물산, 이건 홍보관…. 아, 건물 외벽에 회사 로고가 없다. 기둥마다 감사카메라만 주렁주렁 달렸다. 우리는 그들을 볼 수 없고 그들은 우리를 다 본다. 이 시선의 비대칭, 비가시화는 권력의 속성이다. 시인 김수영은 ‘하… 그림자가 없다’라는 시에서 노래했다. “우리들의 전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들의 싸움을 이다지도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고. 


“주말에는 삼성 사옥으로 결혼식을 많이 와요. 근데 어디가 어딘지 모르니까 우리가 종일 길을 안내해요. 이쪽입니다. 저쪽으로 가세요. (웃음) 가끔 왜 농성하느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럼 전단지를 드리거나 상황을 설명하죠. 어떤 분이 얘기 다 듣더니 그러더라고요. 세월호랑 똑같네.”


삼성호에 탔다가 가라앉은 이들. 둘레의 영정 사진과 피켓 문구가 하나씩 눈에 든다. ‘삼성에서 병들고 죽어간 노동자 200여명’ ‘고 황유미 85년생’ ‘고 윤슬기 81년생’ ‘삼성은 이 노동자의 죽음 앞에 사죄하라’ ‘No More Death in Samsung’…. 고 황유미는 영화 <또 하나의 약속>으로 알려진 실제 인물이다. 대기업에 들어갔다고 온 가족이 기뻐했으나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하다 1년 8개월 만인 2007년 백혈병 진단을 받고 숨졌다. 딸을 앞세운 속초의 택시운전사 황상기씨는 투사가 됐다.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 박종철 아버지 박정기, 김유민 아빠 김영오처럼. 


자식을 잃고 그들은 싸운다. 세월호 유가족은 이렇게 말했다. “소를 잃어본 사람이 외양간을 고치지, 소가 멀쩡하게 있는 사람은 모르더라고.”(고 임세희 학생 아버지 임종호) 그러니까 황상기씨는 8년째 외양간을 고치는 중이다. 천지가 만산홍엽 물드는 가을철 대목에도 택시를 세워놓고 속초에서 이곳 강남역 농성장으로 일주일에 세 번은 들른다고 했다. 삼성이 피해자 가족을 개별적으로 접촉해서 돈봉투를 건네고 무마시키는 식의 보상이 아닌, 사회적 합의기구를 만들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을 지키는 올바른 해결을 요구한다. 딸은 이미 보냈으나 다른 딸들만큼은 지키려 전심전력하는 이런 삶을, 아직은 소가 멀쩡한 대다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렇게 다른 사람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려는 각자의 윤리적 노력을 스피노자는 ‘도의심’(pietas)이라고 했다. 이 도의심에서 세상을 바꿔낼 정치적 가능성을 점쳤다. 

저녁 6시, 해 떨어질 무렵 농성장으로 하나둘 모여든다. ‘반도체의 날’ 행사에 ‘돈보다 생명’ 퍼포먼스를 하러간 활동가들이 돌아와 컵라면으로 추위와 허기를 달랜다. 반가운 얼굴들. 5년 전 만났던 나의 인터뷰이도 있다. 산업의학 전문의이자 반올림 활동가인 그는 대한민국 청년들 기업선호도 1위 삼성에서 가장 어리고 약한 노동자들이 화학약품과 방사능으로 조용히 죽어간다는 것을 내게 알려준 사람이다. 그 뒤로 나는 삼성 없이 살았다. 어차피 시들해진 삼성그룹 사보 일을 접었고 웬만하면 삼성 제품을 들이지 않았고 삼성과 싸우는 단체에 월 2만원씩 후원을 시작했다. 그리고 ‘반올림’과 페이스북 친구를 맺고 소식을 받아보다 23일 만에 농성장에 들렀다. 시월의 마지막 밤 그는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다. ‘농성장에 뭐가 필요하냐고 묻는 분들이 많은데 여기가 오성급 호텔이라 웬만한 건 다 있습니다. 사람이 가장 필요해요. 그냥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