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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본다는 것은 보고 있는 것의 이름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몇 해 전 탤런트 최불암 씨를 인터뷰했다. 실제로 뵈어도 ‘전원일기’ 김회장님처럼 푸근하고 구수한 말투였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당신의 연기인생을 회고하면서 이런 말을 터놓았다. “배우는 하얀 도화지여야하는데 나는 이제 신문지처럼 글자가 많은 종이가 된 것 같아요.” 연극무대의 독백처럼 유독 쓸쓸하게 들리던 그 말, 도화지가 아닌 신문지. 그건 그러니까 나였다.

나는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주로 인터뷰를 맡아 했다. 인터뷰는 다른 사람의 삶을 내 삶으로 읽어내는 일이다. 삶을 보는 눈이 있어야하고 들을 귀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느날 부턴가 말이 들리지 않았다. 내 몸이 이미 판단들, 생각들, 입장들로 꽉차 들을 수 없는 몸이 된 거 같았다. 몸이 말을 튕겨냈다. 겨우 말이 들어오면 구토감이 났다. 급기야 그렇게도 좋아하던 인터뷰를 중단했다.

당시 ‘위클리수유너머’에서 진행하던 전선인터뷰 꼭지에서 겨우 잡아놓은 귀한 취재를 다른 동료에게 넘겼다. 장애인단체에서 일하는 친구의 부탁으로 장애인 부모 인터뷰 하기로 한 약속도 사전미팅까지 해놓고 결국 ‘못하겠다’고 말했다. 

몇 년이 지났을까. 그 장애인 단체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이번에 내가 만날 사람은 정신장애인 당사자 방송 운영자다. 어제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오랜만에 가슴이 뛰었다. “그 후 저를 아들로 안 보고 환자로 보더라고요.” “무엇이 그들을 가두나.” 이런 문장들. 내 몸에 가득한 편견이 드러나 한없이 부끄러워지고 그 부끄러움의 작용으로 사고가 순해지는 순간이다. 아마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신문지가 빛바랬을 테니 누런 종이에 무엇이라도 받아적을 수 있지 않을까, 설레는 아침이다.


<본다는 것은 보고 있는 것의 이름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 폴 발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