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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걸의시집

파랑도 / 이희중


파전을 익히며 술을 마시는 동안

더워서 벗어 둔

쇠걸상에 걸쳐 둔

저고리, 내 남루한 서른 살

황태처럼 담배잎처럼

주춤 매달려 섭씨 36.5도의 체온을

설은살 설운살 서른살을 말리고 있다

소란한 일 없는 산 속의 청주(淸州)

한가운데 섬이 있다

소주집 파랑도(波浪島)

바람 불어 물결 치고 비 오는 날은

사람마다 섬이며, 술잔마다 밀물인데

유배지 파랑도에서

저고리는 매달린 채 마르기를 기다린다

술병이 마르기를 풍랑이 멎기를

 

- 이희중 시집 <푸른비상구>, 민음사


사진을 시작할 때부터 알던 후배가 있는데 어제 첫 전시를 했다. 사진위주 갤러리 류가헌. 친한 선배부부가 하는 곳이다. 보도자료 써 달라, 일손 부족하다며 몇 번을 도와달라던 언니의 청을 들어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서 축하와 자봉을 동시에 해결하러 겸사겸사 갔다. 마당이 꽉 찼다. 엉거주춤 서 있다가 떠밀려간 곳은 싱크대 앞. 운명이다. 조용히 설거지를 했다. 전시오픈 행사가 끝나고 사람들은 뒷풀이를 가고 나는 스태프와 남아서 정리했다. 생맥주 기계에 술이 찰랑이고 항아리 뚜껑 접시에 골뱅이무침이 뷔페 상차림처럼 수북하다. “맥주가 마르지 않는 샘물이네" 너나없이 콧노래를 부른다. 알 굵은 골뱅이 반, 오이 반의 비율도 비현실적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우리는 돈 걱정 없이 맥주와 골뱅이를 포식할 수 있다는 기쁨에 먼저 취했다. 한옥 처마 끝 사이로 드러난 밤하늘을 힐끔거리며 모기를 잡아가며, 하얀 거품 1.2센티미터 짜리 맥주를 마셨다.

형부가 사진가다. 에베레스트를 등반하는 전문가로, 동료를 산에 묻고 온 적도 있는 험한 산을 탄다. 9월에 또 안나푸르나를 간다네. 죽을 줄도 모르는데 왜 자꾸 가세요? 물어보려다가 위험한데 왜 가느냐며 말끝을 흐렸다. “길은 항상 없어. 지나온 길 뒤를 돌아봐도 길이 없어. 어떻게 여길 왔나. 길은 어디에 있는 걸까. 내 몸에 길이 있는 거야.” 루쉰의 길타령의 후속버전 같다. 형부가 작업실로 데려간다. 사진과 학생 때 군대에서 찍은 사진, 새벽마다 출사를 나갔던 90년대 청계천 사진, 에베레스트산 등반 사진. 영상으로 만들어놓은 파일을 봤다. 음악과 함께 흘러가는 시절. 파랗게 설운 스무살, 찡하게 설운 서른살, 점잖게 설운 마흔살. 희미해져가는 설움. 다시 맥주를 앞에 두고 형부가 말한다. 지영 씨 생각하면 애처로워. 자기 글을 쓰면 좋겠어. 더 능동적으로 기획을 해서 글을 써봐. 네. 착하게 대답하고. 형부는 마당에 담배 피러 나가고 여자 넷이 샘물을 마셨다. 언니가 주섬주섬 리본을 묶어서 나에게 건넨다. “난 술이 취하면 뭘 주고 싶어.” 주황색 양장본 노트. 비봉출판사 자본론 표지색깔. 폭풍 감동한 나는 어쩔 줄 모르다가 시 한편 읽어드릴게요.” 가방에서 김수영 전집1을 꺼내서 달나라의 장난을 읊었다. 언니가 나도하더니 가방에서 심보선 시집을 꺼낸다. ‘인중을 긁적거리며"라는 시다. 길고 긴 시 낭송. 소란할 일 없는 서촌의 한 가운데 섬이 있다. 유배지 류가헌에서 기다린다. 샘물이 마르기를, 설움이 멎기를.

후배 뒷풀이 자리에 들렀다가 축하의 술잔을 기울이고 귀가했다. 다음 날 나는 결심했다. 다시는 술을 먹나 봐라. 첫 애를 출산하고도 다짐했다. 다시는 애를 낳나 봐라. 총량은 과음규정을 크게 넘지 않았지만, 빈속에 설움과 시를 섞어 마셔서 그런가 보다. 자다가 먹다가 토하고 대오각성하며 누워있는데 전화가 왔다. N에서 공부하는 연구실 친구다. “어제 토론회 잘 했어? 서점에 갔다가 심보선 시집 새로 나왔길래 주려고 샀는데 못 전해줬네.” 맹렬히 돌던 팽이가 멈춘다. 구토와 설사와 눈물로 얼룩진 남루한 생의 시계가 멈춘다. 생의 어느 시점에 한 사람이 시를 낳고 그것을 누군가가 보고 또 한 사람을 떠올렸다는 사실이 왜 이리도 벅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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