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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세상

희망버스와 소금꽃나무


# 갈까 말까

한진중공업 최초의 여성 용접공 출신, 김진숙 부산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고공농성 185일차. 이를 두고 ‘여자의 몸’으로 극한의 외로운 투쟁을 전개한다고들 얘기한다. 모두가 한 여성 노동운동가의 입신에 주목하고 칭송할 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나는 잠시 딴 생각을 했다. ‘그렇게나 오래 집을 비워도 괜찮은 거면 결혼을 안 했거나 했어도 아이가 없거나 아니면 친정엄마가 옆에 있나보다.’ 얼추 적중. 52세 김진숙은 비혼이다. 그 사실을 알려준 친구가 덧붙인다. 아마 김진숙 정도의 인물이 남자였으면 그의 옆에는 헌신하는 여성이 필시 있지 않았겠느냐고.

지난주, 김대리의 대출광고 스팸 문자를 압도한 문자메시지가 있으니 ‘희망버스 타자’는 불온한 속삭임이다. 또 다른 ‘여자의 몸’은 고민했다.남편 1인 자식 2인의 삼시세끼 보급투쟁을 날마다 치르는 전사이자 하필 생리주기가 딱 걸린 생물학적 존재에게 1박2일 부산행은 번잡스럽고 부담스러운 일이다. 갈까 말까. 시계추처럼 흔들렸다. 망설임이 길어질수록 그리움이 커져갔다. 뭘까. 나를 흔드는 이 느낌, ‘심장의 나태’를 집단적으로 일깨우는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지상에 발 묶인 여성은 고공에 매달린 여성을 연민하고 동경했다. 이틀 치 국을 끓여놓고 토요일 아침 집을 나섰다.

# 무지개 버스

(광장에서 만난 선배남편)
오후 1시. 시청 앞 재능교조 농성장. 희망버스 집결지다. 이주노동자 소모뚜씨도, 게이활동가 김조광수씨도 만났다. 나는 노들장애인야학과 동행했다. 청소년, 이주노동자, 장애인, 인권단체 활동가 등 소수자가 타는 차에 배정됐다. 일명 무지개버스 16호차. 바퀴 달린 동료들을 보자 궁금했다. 저 덩치 큰 휠체어를 어떻게 싣고 간담. 잠시 후 대형트럭이 왔다. 탑승시작. 인도에서 차도로 전동휠체어가 ‘덜커덩’ 낙하했다. 활동보조인 세 사람이 장애인을 안아서 버스에 앉혔다. 100kg이 넘는 전동휠체어. 그것을 또 건장한 청년들이 들어서 트럭에 차곡차곡 실었다. 그러니까 장애인의 부산 나들이는 ‘외출’이 아니라 ‘이사’였다. 우리 차는 오후 2시 반이 돼서야 출발했다. 


 “지금 상황이 슬프고 안타깝기보다는 많이 설렙니다.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합시다.” (이은정 천주교인권연대 활동가)

“전자주민증 반대에 사람들이 관심이 적어서 저희가 외롭게 싸우고 있거든요. 마찬가지로 외로운 투쟁을 하는 김진숙 씨에게 힘을 보태드리려고 갑니다.” (장여경 진보넷 활동가)

“어젯밤 김진숙씨가 쓴 <소금꽃나무>를 읽다가 너무 슬퍼서 그냥 덮었어요. 막상 희망버스 타니까 MT가는 기분이 들고 좋네요.” (정민경 진보넷 활동가)

“만 명이 모이는 그 자체가 울컥합니다. 연대의 새로운 모델이 되는 것 같아요. 여기서부터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구속노동자 후원회 활동가)

1차 희망버스를 탔는데 너무 재밌어서 또 신청했다는 희망버스 단골손님, 만날 공부만하라고 잔소리하던 고등학교1학년 조카와 함께 간다는 개념 이모, 희망버스 타기 위해 며칠 야근도 안 하고 가족에게 잘 했다는 워킹맘, 김진숙 지도위원이 무사히 내려오길 바라는 마음에 간다는 학생, 내가 힘을 얻고 싶어서 간다는 시민 등 제각각 사연을 밝혔다. 1983년 하반신 마비로 중도장애인이 된 박경석 노들장애인 야학 교장은 ‘20년 만에 고속버스 타고 부산에 간다’는 벅찬 소회를 페이스북에 남겼다.


# 빗속 행진

오후 7시 30분 부산역 도착. 폭우가 쏟아진다. 광장을 메운 1만 여명의 함성. 우산과 깃발이 춤춘다. ‘희망과 연대의 콘서트’ 이미 축제는 시작됐다. ‘3호선버터플라이’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한쪽에서는 부산지역 장애인단체에서 준비한 천막을 쳤다. 임시 대피소. 뒤늦게야 트럭이 도착하고 휠체어를 내렸다. 주인을 찾은 휠체어. 우비를 덧씌운다. 활동보조인이 함께 선다. 광장으로 한 대씩 나아갔다. 존재와 존재가 일사분란하게 분리-장착 되는 장애인 투쟁이 문득 신비롭다. 무대 조명, 가로등 불빛, 형형색색 우비가 빗물 웅덩이에 반사되어 온통 번들거린다. 우주정거장처럼 낯선 공간. 김진숙과 결합하기 위해 모인 거대한 군중들. 희망버스 사건 자체가 SF적이다. 돈만 아는 저질들에겐 스릴러 공포물일지도 모를 일.



오후 9시 40분. 행진 시작. 문정현 신부, 백기완 선생이 앞장섰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휠체어 부대가 뒤따랐다. 그림 좋다. 시민 1만 여명이 영도대교를 건너 걸었다. 신발이 첨벙첨벙 빗물 위를 떠간다. 여기가 부산인지 서울인지. 2008년인지 2011년인지 잘 분간이 가지 않을 무렵. 바다가 잠시 보였다 사라졌다. 밤 12시가 다 되어 도착했다. 한진중공업 부산 영도 조선소를 700미터 앞둔 지점. 봉래로터리 8차선 도로에는 방패와 곤봉으로 무장한 경찰이 차벽을 쌓고 기다렸다. 5분 거리에 김진숙 지도위원이 있으나 다가가지 못한다. 인도 쪽 일부 참가자는 생수병을 던지고 두드려가며 끈질기게 진입을 시도했다. 건물 옥상에는 카메라 방송기자 20여 명이 매달려 역사현장을 기록했다.


# 직녀에게

새벽 1시 40분. 김진숙 지도위원과 전화통화가 성사됐다. “여러분들을 한 달 동안 목이 메도록 기다렸습니다. 이명박 정권은 우리가 서로에게 힘이 되는 게 두려운 가 봅니다. 힘내십시오. 우리는 반드시 만날 것입니다.” 대형 스피커를 뚫고 나오는 생생한 목소리.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권위 있는 음성. 짧은 통화가 침묵의 밤을 열어 밝힌다. 그 와중에 “우윳빛깔 김진숙~ 사랑해요 김진숙~” 수건으로 찜질방 양머리를 치장한 일군의 젊은 친구들이 애교 돋는 구호로 응답한다.

그녀의 말이 더 나올 것 같은 스피커에서 귀를 떼지 못하는데 <직녀에게>가 흐른다.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우리는 만나야 한다.’ 운명적인 전언. 20년 전 노조에서 간부수련회를 갔다. 이 노래를 좋아하던 나는 악보를 수첩에 지니고 다녔다. 기타를 든 그가 연주해주었다. 너무 좋은 곡이라면서 밤새 연습하고 불렀다. 그날도 하염없이 비가 내렸다. 그 날 그 노래가 아니었으면 나는 그와 결혼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인연을 점지하는 노래. 나는 김진숙과 영혼 층위에서 꽁꽁 묶였다고 느끼고 말았다.


# 피란생활자

새벽 2시 30분. 오작교와 노둣돌을 우리 손으로 만들자! 희망벽돌쌓기가 시작됐다. 뒤에서부터 벽돌과 모래주머니를 든 행렬이 앞으로 나아갔다. 나도 벽돌을 나르려고 뒤로 갔다. “우리 줄 서서 전달합시다!” 누군가의 말에 징검다리처럼 대오를 정비했다. 컨베이어벨트 돌아가듯 옆으로 옆으로 벽돌을 날랐다.갑자기 “뒤로 빠져” 고함이 들린다. 하얀물과 파란물이 번갈아 분사. 최루액 한방에 시민들은 일순간 뒤로 밀렸다. “천천히 천천히” 구호를 외치면서 후퇴. 빗물이 마른자리에 눈물이. 눈물이 지난자리에 최루액이. 얼굴이 벌게져 너도나도 철퍼덕 주저앉았다.

노래와 연설 등 자발적 문화공연이 밤새 진행됐다. 어디선가 뜨끈뜨끈한 주먹감자가 나왔다. 뽀얀 속살에 허기를 달래는 사람들. 초코파이가 돌고 물과 휴지가 전달됐다. “좀 드소”출처 모를 먹을 것들이 자꾸만 내 손에 놓여있다. 정작 부산명물 오뎅탕은 먹지 못했다. 부산 경남 아고라 회원이 희망버스 시민들을 위해 5000인분의 오뎅탕을 준비했다는 소식을 유인물에서 접했으나, 경찰에서 오뎅탕이 담긴 솥을 ‘집회위험물품’이라며 수거해 갔다고 한다.

오전 7시까지 먹다가 웃다가 걷다가 졸다가. 날이 밝았다. 여기저기서 선채로 앉은 채로 누운 채로 새우등처럼 꼬꾸라져 잠이 들었다. 노숙의 달인들. 6.25 전쟁영화에 나오는 피란민들 같았다. 재난상황. 근처 해동병원이 화장실을 개방했다. 줄이 길다. 한 시간 지나서 가보아도 마찬가지. 줄지 않는다. 2층, 3층으로 올라가본다. 최루액을 뒤집어써서 팔뚝이 퉁퉁 부은 아저씨가 몸을 닦는다. 한 여성이 휴지를 주고 가다가 되돌아오더니 소시지 스틱을 건넨다. 서로 마주보고 웃는다. 화장실 휴지통은 바닥으로 넘친다. 이걸 다 누가 치울까. 청소노동자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고생할 생각을 하자 죄송했다. 약자들의 세상을 위해 투쟁하면서도 약자의 노동에 빚져야 한다.


# 강주룡과 김진숙

오전 9시. 먼저 나섰다. 낮에는 친정아버지 생신, 저녁에는 시아버지 생신 모임이 있는 선배랑 서울행 KTX를 탔다. 노동운동판에서 20년을 보낸 선배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공농성은 여성이었다는 얘기를 들려준다. 1930년 평원고무공장에 다니던 강주룡. 남성에 비해 절반에 불과하던 여성임금을 깎고 이에 저항하는 49명을 부당해고 하자 평양 을밀대 지붕위로 올라갔다고 한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겠다”는 강주룡의 각오는 한진중공업 생산직 172명 정리해고에 맞서는 김진숙의 외침으로 이어진다.

선배는 ‘김진숙 지도’가 껍데기뿐인 노동운동 관료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라고, 자기 삶으로 얘기하니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고 말했다. 크게 와 닿지 않던 얘기들. 더 해달라고 졸랐다.

“민주노총 사업장에서 파업을 시작하면 꼭 김진숙 지도가 가서 연설하거든. 어디든지 꼭 가. 전부 감동해. 70년대 조선소 높은 곳에서 용접하다가 사람이 떨어져 죽어도 그냥 빗자루로 쓸어서 양동이에 담아 버렸대. 그걸 보고 노동운동을 시작한 얘기하면 다 입을 다물지 못하지. 그래서 경찰이 희망버스 막는 거야. 그 위력을 아니까.”


# 지상의 폐허

선배는 잠들고 나는 <소금꽃나무>를 읽었다. 몸의 말들이 깨알 같다. 앞부분은 <전태일평전>만큼 충격적인 실상이 펼쳐진다. 눈앞이 흐려지는 얘기들. 요즘 상황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끊임없이 노동자가 잘려가고 죽어간다. 사무실 앞에는 아직도 빈소가 놓여있는 현실을 그녀는 고한다. 2003년 노동자탄압 규탄대회 연설문 중 인용해보면,

‘100만원 주던 노동자 잘라 내면 70만원 주도 하청으로 줄줄이 들어오는 게 얼마나 신통했겠습니까? 철의 노동자를 외치며 수백 명이 달려들다가도 고작해야 석 달만 버티면 한결 순해져서 다시 그들 품으로 돌아오는데, 그게 얼마나 같잖았겠습니까?…세기를 넘어, 지역을 넘어, 국경을 넘어, 업종을 넘어, 자자손손 대물림하는 자본의 연대는 이렇게 강고한데 우리는 얼마나 연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들의 연대는 얼마나 강고합니까? 비정규직을, 장애인을, 농민을, 여성을, 그들을 외면한 채 우리는 자본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저들이 옳아서 이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연대하지 않으므로 깨지는 겁니다.’


군더더기 없고 속 시원한 일갈. 좋은 책은 세상을 명료하게 이해시켜준다. 민주주의를 이루었다고 세상이 좋아졌다고 떠드는 사이 진행된 ‘지상의 폐허’를 그녀는 세세히 목도한다.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로 세상에 알린다. 글을 쓰고 싶었던 게 아니라 말을 하고 싶었던 거라고. ‘인간이 참 고귀한 존재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고백하며 ‘나는 아직도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말할 때 그녀는 혁명가다.


# 소금꽃나무 효과

<소금꽃나무>를 다 읽었다. 1박 2일의 기적. 희망버스, 그 자발적 시민행동의 비밀이 풀렸다. ‘어떤 사람을 아는 사람은 희망 없이 그를 사랑하는 사람뿐이다’는 벤야민의 말이 떠올랐다. 아무런 희망 없이 노동자를 사랑하는 김진숙. 범주로서 노동자가 아니라 ‘한진중공업 아저씨’ 개개인 분노와 눈물과 한숨과 그 억장무너짐을,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 세 동료의 한 맺힌 죽음을 아는 그녀. 아는 만큼 사랑해서 독사처럼 칭칭 감겨드는 것이다. 입사동기이자 동지인 김주익의 죽음을 겪고는 죄책감에 8년 동안 방에 불을 떼지 않았다니 35m 고공으로의 몰락은 필연으로 보인다. 그 삶의 자명함이 어지러운 세상을 밝혔다. 김진숙이라는 등대 불빛에 끌려 너도나도 부산으로 모인 것이 아닐까.

2차 희망버스는 오후 3시 30분 해산했다. 3차 희망버스를 기약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김진숙 지도위원을 만나지 못했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게다. 나도 그랬다. 희망버스 타고 김진숙의 삶을 통과했고 나는 감염되었다. 삶에서 집중해야할 것이 분명해졌다. 홀가분함. 그리고 고공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한 여성의 몸은, 귀가와 동시에 생생한 집안의 폐허를 목도했다. 날씨가 더워서 국은 다 상해버렸다. 바닥엔 머리카락과 먼지가 엉켰다. 건조대 빨래는 말라비틀어질 지경이다. 시지프스의 형벌 같은 이 사태가 이상하게 슬프지 않다. 희망없이 삶을 사랑한다는 것, 그러면서도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하는 그녀에게 배운 소금꽃나무 효과다.